시-시조·신문.카페 등 236

[한은형의 느낌의 세계] 삶을 생각하기 위해 찾아야 할 곳

[한은형의 느낌의 세계] 삶을 생각하기 위해 찾아야 할 곳 한은형 소설가 입력 2022.01.20 03:00 생일이니 특별한 곳에 데려가 준다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를 떠올리겠는가? 뤼크가 에밀리를 데려간 곳은 묘지다. 파리 몽마르트르에 있는 페르 라쉐즈 묘지. 수많은 무덤 중에서도 그가 발을 멈춘 곳은 발자크의 무덤이다. 좋아하는 사람이냐고 묻기도 전에 이렇게 말한다. “여긴 아무도 없어서 여기 앉길 좋아해요.” 나는 이걸 보다 웃음이 터졌다. 발자크는 한국에서만 인기가 없는 게 아니라 모국인 프랑스에서도 저런 대우를 받는가 싶어서. 이 장면을 넷플릭스 드라마인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서 보고 발자크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그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고, 읽은 게 몇 편 안 된다...

[백영옥의 말과 글] [235] 와락, 왈칵, 뭉클

[백영옥의 말과 글] [235] 와락, 왈칵, 뭉클 백영옥 소설가 입력 2022.01.15 00:00 언제부터인가 사람을 잘 믿지 못하게 됐다. 믿지 못한다는 건 사람을 의심한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법을 힘들게 익혔다는 말에 가깝다. 특히 부담스러울 정도의 친절로 무장된 사람들에게 더 그렇다. 과도하게 호의가 있었던 사람들의 마지막이 아름답지 못했던 탓도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호의’ ‘친절’ ‘착함’ 자체가 아니라,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과도함’이다. ‘착한 것’과 ‘착해 보이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착하다’는 말은 보통 잘 참는다는 뜻으로 ‘순수하다’보다는 ‘순진하다’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과거에 비해 어린이가 아닌 어른에게 착하다는 칭찬은 반드시 좋은 ..

[산모퉁이 돌고 나니] 무엇이 상식이고 상식 밖일까

[산모퉁이 돌고 나니] 무엇이 상식이고 상식 밖일까 이주연산마루교회 목사 입력 2022.01.14 03:00 한겨울이 찾아오고, 산에 눈이 덮이면 그리운 얼굴이 있다. 그분은 대학에서 평생을 가르치시고 은퇴하여 진부령 정상 흘리에 주로 머무셨다. 선생님은 1960~70년대 가난하던 시절, 제자들의 등록금까지 대주시느라 빈 월급봉투를 받아 들곤 했다. 때론 가불하기까지 하니 교직원들에게 오해를 받았다. “무슨 교수가 돈을 어떻게 쓰기에 이렇게 사시나!” 한번은 선생님께 외국에서 귀국한 제자가 고급 양장을 선물했다. 여행도 자유화되기 이전이니 특별한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제자가 선생님은 ‘속물’이라며 단절을 선언했다. “교수라는 분이 선물을 이렇게 취급하다니!” 이유는 그 선물이 그 교문 앞 양장..

서사敍事로 가는 문

서사敍事로 가는 문 ​ 이영춘 슬픔 같은 장대비가 툭툭 걸음을 멈추게 한다 어둠 저 끝에서 밀려오는 바람소리, 등 뒤에서 누가 비수를 꽂듯, 가슴 한 끝에 비수를 꽂고 돌아선 사람 창에 어리던 북극성 한 쪽이 허리를 굽혀 내 허물을 판화한다 세상은 황량한 이중성의 간판들, 그 간판들이 점멸등처럼 붉은 눈을 켜고 달려오는데 나는 어느 변곡점에서 성인聖人의 도성에 닿을 수 있을까 어제는 바람이 불고 오늘은 비가 오고 빗속에서 붉은 사과가 떨어진다 사과 속에서 씨앗이 떨어지듯 나는 내 발자국 지우며 간다 탓하지 마라 사람아, 바람아, 세상아, 세상 안에서 세상 바깥에서 나는 서사敍事의 문으로 가는 길을 찾는다 ​ 계간 『창작21』 2020년 겨울호 발표

[자작나무 숲] 보드카가 그립다

[자작나무 숲] 보드카가 그립다 한국의 국민주 소주, 러시아 국민주 보드카 공통점은 무색·무취·무미 ‘러시아 모든 정직한 사람들은 절망해서 마셨다’… 아픔과 자책의 술 술 소비량 절반으로 준 오늘의 러시아, 고뇌하는 지식인 사라진 걸까 김진영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입력 2021.12.28 03:00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라는 술이 이토록 순결하고 서정적이어도 되는가. 백석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서 술은 자족적 상상력의 촉매제다. 남자는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그는 사랑하는 나타샤와 깊은 산골로 가 살 것이고,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일 뿐이다. 나타샤와 흰 눈에는 보드카가 제격이련만, 시인은 소주를 선택했다...

개망초

이달의 시 윤일현 개망초 -낙동강94 윤 일 현 서른둘에 홀로 되어 아들 하나 키우며 잡초처럼 살다가 며느리 들어오자 살림 물려주고 툇마루에 앉아 종일 흰 구름만 바라보며 어디든 훨훨 날아다니고 싶다던 영천댁 꽃상여 나가던 날 칠월 뭉게구름 하늘에서 내려와 길가 가득 개망초 꽃으로 흩어졌다 하얀 두건 쓴 개망초들 바람에 온 몸 흔들며 곡하다가 상여를 메고 뒷산으로 올라갔고 할머니는 구름이 되어 먼 길 떠났다 윤일현은 1956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사람의 문학’ ‘현대문학’ 등에 시를 발표하고 시집 ‘낙동강’을 출간하며 등단했다. 시집 ‘꽃처럼 나비처럼’ 교육평론집 ‘불혹의 아이들’ ‘부모의 생각이 바뀌면 자녀의 미래가 달라진다’ ‘시지프스를 위한 변명’ 등이 있다. 지성교육문화센터 이사장, 대구시인협회 ..

[백영옥의 말과 글] [232] 규칙 없음

[백영옥의 말과 글] [232] 규칙 없음 백영옥 소설가 입력 2021.12.25 03:00 한 해를 마무리할 때 ‘다사다난’이란 말을 쓴다. 우리가 복잡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심 탈레브의 책은 주로 12월에 다시 읽는다. 반복해서 읽는 건 새겨야 할 문장이 많아서고 내가 그 부분을 자주 잊는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가 말하는 ‘복잡계’나 ‘비선형성’이 우리의 관념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이솝 우화를 읽고 자란 우리는 인과론에 익숙하다. 게으른 베짱이는 굶고, 일찍 일어나면 더 많이 먹이를 얻는 새처럼 말이다. 하지만 인과론은 종종 우리의 예측을 빗나간다. 우리는 스트레스가 나쁘다고만 생각하지만, 실상 근육이나 창의성은 스트레스나 자극 없이는 성장하지 못한다. ‘창의적인 사람’들의 필수 요소가 위험..

[김지수의 서정시대] ‘외로움의 동굴’에서 서로에게 필요한 건 다정함

[김지수의 서정시대] ‘외로움의 동굴’에서 서로에게 필요한 건 다정함 10년 함께하다 떠난 조선족 이춘자 할머니, 한 계절만에 우리 가족 초대 마침 그날은 내 생일… 둘러앉아 삼겹살 굽고 생일 노래 ‘다정한 풍경’ 외로움이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시대, 더 많은 ‘이춘자 할머니’가 필요 김지수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 입력 2021.12.23 03:00 경계 없이 선선하던 조선족 이춘자 할머니가 10년을 머물다 떠난 후, 우리 집 대문은 적적해졌다. 말을 튼 이웃들과 북적북적 우수리처럼 주고받던 옥수수니 밤이니, 옷 보따리 대신 현관 앞엔 택배 상자만 고적하게 쌓여갔다. 그렇게 훌쩍 한 계절이 지났다. 노인 간병을 한다며 옆 동네 아파트로 일터를 옮긴 이춘자 할머니가 우리를 초대한 때는 우연히도 내 생일 점심이..

[최영미의 어떤 시] [50]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최영미의 어떤 시] [50]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1.12.19 17:35 | 수정 2021.12.20 00:00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서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 공(空)인 나는 미래로 가자. 사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잘못된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나혜석(羅蕙錫·1896∼1948) 처음부터 격하게 시작하는, 나혜..

안개를 안아 보다

안개를 안아 보다 - 이해리 안개를 안아 보다 - 이해리- 외로움도 사무치면 안개도 사람인가하여 안아보는 밤이 있습니다 안아도 안아도 실감이 없는 사람, 뼈도 살도 없이 푸르스름 분위기만 있는 그를 품는 밤엔 내가슴에 한 겹 더 허무의 지층 쌓이지만 그가 보여주는 수묵담채빛 선경은 길을 잃어도 좋은 피안입니다 멀리 無優寺(무우사) 연등 물결 눈물처럼 가물거리고 사십 리 복사꽃밭은 분홍 꽃잎만 공중에 둥둥 떠내 려 보낼 때 어디선가 귀촉도귀촉도 두견이 울어 그도 나처럼 살고 싶은 누구입니까 마음은 자욱하나 드러낼 수 없는 실물을 가진 누구입니까 그의 가슴을 만지면 잠시 사랑했다 헤어진 이름 생각나고 희미해진 이름 끌고 골짜기 배회하는 서늘한 누군가가 느껴집니다. 어쩌면 너무 멀어서 쉽게 만져보기 어려운 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