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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의 어떤 시] [50]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최만섭 2021. 12. 20. 04:55

[최영미의 어떤 시] [50]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입력 2021.12.19 17:35 | 수정 2021.12.20 00:00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서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 공(空)인 나는 미래로 가자.

 

사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잘못된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나혜석(羅蕙錫·1896∼1948)

처음부터 격하게 시작하는, 나혜석의 유언과도 같은 시. ‘살러 가자’가 아니라 “죽으러 가자”다. 비장한 내용이나 문체는 사뭇 당당하다.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파리로 가서 죽고 싶다는 시를 쓰고 왜 못 떠났을까? ‘죽으러’는 ‘살러’의 역설적 표현 아닌가. 얼마나 시달렸으면….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라는 제목은 나혜석이 붙였나? 후일 친구나 편집자가 붙인 건지? 알 수 없으나 제목처럼 그는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했다.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조선 여성 최초로 세계 일주를 했던 나혜석은 파리에서 만난, 남편이 아닌 남자와의 관계가 알려지며 가족에게 외면당하고 세간의 비난과 조롱을 받는다. ‘부도덕한 신여성’은 가난과 병에 시달리다 행려병자가 되어 52세에 서울시립자제원(慈濟院) 병동에서 생을 마감했다. 1934년 ‘삼천리’에 발표한 이혼 고백장의 한 문장이 내 귀에 메아리친다. “나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