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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의 말과 글] [227] 최악의 이별에 대하여

최만섭 2021. 11. 20. 04:52

[백영옥의 말과 글] [227] 최악의 이별에 대하여

입력 2021.11.20 00:00
 
 

그날, S는 페이스북에 들어갔다가 약혼녀 L의 프로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가족 및 결혼/연애 상태가 ‘약혼’에서 ‘연애 중’으로 바뀐 것이다. 충격적인 건 ‘~와 연애 중’이라는 표시 옆에 S의 사진이 아닌, S와 가장 친한 친구의 사진이 있었다는 것이다. 충격에 빠진 그는 L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녀에게서 지난 3개월 동안 그의 절친과 사귀었고, 두 사람이 이제 그 사실을 알리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최악의 이별에 대해 생각할 때 나는 몇 년 전 ‘페이스북 심리학’에서 읽은 이 사례가 떠오른다. 이것은 흡사 이별을 ‘한다’기보다 정리 해고처럼 이별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심리상담가인 친구가 내게 다른 관점에 대해 얘기했다. ‘차단’ ‘읽씹’ ‘프로필 메시지 변경’ 등은 ‘이별 신호’가 분명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최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적어도 상대가 그것을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시 잠수가 최악의 이별이라는 건가?”라는 내 질문에 그녀는 ‘잠수’ 역시 아주 나쁘지만 대표적인 이별 신호라고 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최악의 이별은 스스로 관계를 끝내기로 결정했음에도 ‘나쁜 사람’이 되기 싫어서 자신의 결정을 상대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방식을 택한 사람들의 큰 착각은 이것이 상대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배려라고 믿는 것이다. 더 큰 폐해는 미묘하게 달라진 관계 속에서 상대가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걸까?”를 끝없이 되묻게 된다는 것이다. 헤어졌으나 헤어진 걸 모르는 사람의 입에선 결국 “헤어져!”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상대에 의해 ‘설계된 이별 게임’에서 승자처럼 보이는 패자가 되는 것이다.

어른의 이별은 ‘회피’가 아니라 ‘대면’이다.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마주 보고 직접 ‘말하는 것’이다. 면전에서 나쁜 사람이라고 욕먹을 각오를 하는 것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이별은 늘 있었다. 좋은 이별은 못 하더라도 사랑했다면 우리 최악은 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