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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의 서정시대] ‘외로움의 동굴’에서 서로에게 필요한 건 다정함

최만섭 2021. 12. 23. 04:55

[김지수의 서정시대] ‘외로움의 동굴’에서 서로에게 필요한 건 다정함

10년 함께하다 떠난 조선족 이춘자 할머니, 한 계절만에 우리 가족 초대
마침 그날은 내 생일… 둘러앉아 삼겹살 굽고 생일 노래 ‘다정한 풍경’
외로움이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시대, 더 많은 ‘이춘자 할머니’가 필요

입력 2021.12.23 03:00
 
 
 
 
 

경계 없이 선선하던 조선족 이춘자 할머니가 10년을 머물다 떠난 후, 우리 집 대문은 적적해졌다. 말을 튼 이웃들과 북적북적 우수리처럼 주고받던 옥수수니 밤이니, 옷 보따리 대신 현관 앞엔 택배 상자만 고적하게 쌓여갔다. 그렇게 훌쩍 한 계절이 지났다.

노인 간병을 한다며 옆 동네 아파트로 일터를 옮긴 이춘자 할머니가 우리를 초대한 때는 우연히도 내 생일 점심이었다. ‘호기심 반 외로움 반’ 롤케이크 하나 들고 찾아간 10평 남짓 아파트에서, 나와 아이는 처음 본 할아버지와 양철 밥상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삼겹살을 굽고 생일 노래를 불렀다. 지직거리는 TV 앞에서 도란도란 귤을 까먹는데, 이 풍경이 너무 다정해서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이상한 정상 가족’이란 이런 거구나!

12월 어느 날. 서울 삼성동 빌딩 지하 식당에서, 취재 끝에 늦은 ‘혼밥’을 먹던 날도 기억난다. 앞치마를 두른 서버 청년이 내 앞에 우거지 뚝배기가 담긴 쟁반을 내려놓으며 휘파람 불듯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던 나는 놀란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았다. 올해 첫 크리스마스 인사였다. 더운 숟가락이 닿은 것처럼 내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일러스트=김성규

“아, 네. 메리 크리스마스! 감사해요.”

“별말씀을요. 제가 더 기쁩니다. 맛있게 드세요”

밥 뚜껑을 열어주고 나가는 그의 반듯한 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최고급 등심 스테이크를 시켰어도 이보다 흐뭇할 순 없겠다.

내가 발견한 이 도시의 신호등은 전부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모두가 외롭다는 것. 얼마 전 ‘고립의 시대’를 쓴 노리나 허츠 박사를 인터뷰했다. 그는 “지금은 인류가 가장 외로운 세기”라며 코로나 이후 외로움 후폭풍이 몰아칠 거라고 경고했다. 외로움은 지구촌 곳곳에 깊숙이 똬리를 틀었다. 고립에 몰려 극단적 선택을 하는 청년들, 경범죄를 저지르고 ‘덜 외로운’ 감옥행을 택하는 노인들, “엄마가 날 안아주지 않는다”며 전화 상담원에게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 상황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찾아낸 해결책은 거창하지 않았다. 동네 식료품점 계산원, 카페 바리스타 등 이웃과 20초 정도 안부 인사를 주고받으라는 것. 이러한 미세 상호작용이 ‘우리’를 일깨우는 중요한 안전 신호라는 말에 나는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각해보면 정글의 약자였던 인간은 소셜 애니멀의 지혜로 야생의 위협과 싸우며 문명을 이룩했다. 문명은 SNS(소셜네트워킹서비스)라는 꼭짓점에서 초연결의 정점을 찍었지만, 동시에 우리는 서로를 감각하던 민감한 협응의 촉수를 잃어버렸다. 너무 쉽게 우정을 거래하고, 물건을 사는 ‘소비 네트워크 서비스’ 안에서, 우리는 점점 더 무력해졌다. 허츠 박사는 ‘돌보는 사람’으로서 시민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면,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로컬의 세계로 나와야 한다고 조언한다.

외로움 동굴에서 서로를 구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다정함이다. 강해지려면 다정해져야 한다. 다정해지려면 부드러워져야 한다. 부드러워지기 위해 우리는 더 필사적으로 서로를 ‘감각’해야 한다. 재난 현장에 고립돼도 다가오는 인간의 기척이 우리를 살게 한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이란 영화가 있다. 잘못 가져온 친구의 노트를 돌려주기 위해 2시간 내내 마을 언덕길을 내달리던 영화에서 소년 아마드는 친구의 집을 찾지 못했지만, 이튿날 친구 몫까지 숙제를 해서 늦지 않게 교실에 도착한다. 공책 갈피엔 작은 꽃잎이 꽂혀 있었다. 그 위로 뉴스에서 본 영국 빈민가 초등학교 교사의 모습이 겹쳐 떠오른다. 코로나 격리 기간에 18㎏짜리 배낭을 앞뒤로 둘러메고 8㎞를 걸어 제자 78명에게 점심을 배달하던 파울스 선생님은 흡사 코알라나 캥거루처럼 보였다.

“진화의 생존자는 최적자가 아니라 다정한 자”라고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책에서 그랬던가. 가까워질수록 다정해지는 우리는 로컬 애니멀이다. 그래서 외로움이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이 시대에, 우리는 더 많은 아마드, 더 많은 파울스 선생님, 더 많은 이춘자 할머니가 필요하다.

다시 한번 그날의 점심상이 떠오른다. 저 멀리 중국 창춘에서 온 할머니를 사이에 두고, 90대 할아버지와 아홉 살 아이와 내가 만났다. 문턱을 낮추고 서로를 허용하는 그것을 ‘외로움 보험’이라 할까. 내년 설에 떡국을 함께 먹자며 헤어지는데, 문풍지로 찬 바람을 메꾼 듯 배꼽 아래가 든든했다. 두 노인이 문 앞에 서서 와이퍼처럼 나란히 손을 흔들었다. 모두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