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조·신문.카페 등 236

[최영미의 어떤 시] [48] 행복

[최영미의 어떤 시] [48] 행복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1.12.06 00:00 눈이랑 손이랑 깨끗이 씻고 자알 찾아보면 있을 거야 깜짝 놀랄 만큼 신바람나는 일이 어딘가 어딘가에 꼭 있을 거야 아이들이 보물 찾기 놀일 할 때 보물을 감춰두는 바위 틈새 같은 데에 나무 구멍 같은 데에 행복은 아기자기 숨겨져 있을 거야. -허영자 (許英子·1938~) /일러스트=김성규 정말 어딘가에 그게 있을까? 왜 내 눈엔 안 보이는 거지? 깜짝 놀랄 만큼 신바람 나는 일이 지금도 있을까. 중년을 지나 깜짝 놀랄 일은 누가 다쳤다든가 누가 암에 걸렸다든가 하는 슬픈 일이었다. 놀랍지도 신바람 나지도 슬프지도 않은 하루를 보내고 허영자 선생님의 ‘행복’을 읽었다. 친구를 앞에 두고 말하는 듯 구어체의 “..

[백영옥의 말과 글] [227] 최악의 이별에 대하여

[백영옥의 말과 글] [227] 최악의 이별에 대하여 백영옥 소설가 입력 2021.11.20 00:00 그날, S는 페이스북에 들어갔다가 약혼녀 L의 프로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가족 및 결혼/연애 상태가 ‘약혼’에서 ‘연애 중’으로 바뀐 것이다. 충격적인 건 ‘~와 연애 중’이라는 표시 옆에 S의 사진이 아닌, S와 가장 친한 친구의 사진이 있었다는 것이다. 충격에 빠진 그는 L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녀에게서 지난 3개월 동안 그의 절친과 사귀었고, 두 사람이 이제 그 사실을 알리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최악의 이별에 대해 생각할 때 나는 몇 년 전 ‘페이스북 심리학’에서 읽은 이 사례가 떠오른다. 이것은 흡사 이별을 ‘한다’기보다 정리 해고처럼 이별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심리..

[백영옥의 말과 글] [222] 오래 달리기

[백영옥의 말과 글] [222] 오래 달리기 백영옥 소설가 입력 2021.10.16 00:00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인용되는 고전적인 말 중에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가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최근 뒤집힌 채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는 말로 더 자주 인용되곤 한다. 다양한 도전을 하며 꾸준히 일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노하우가 궁금했다. 가수이며 배우인 김창완에게 그 비결을 물은 적이 있는데,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게 어떤 일이든 스스로 그만두겠다고 하지 않는 것. 그냥 계속하는 것. 잘릴 때까지. 늘 ‘최고’라고 생각하던 예술가에게서 ‘잘리기 전까지’라는 의외의 말이 나왔다는 것에 많이 놀랐었다. 인간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많은 방어기제를 가지고 산다. 헤어질 기미가 보이면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시간의 재가 되기 위해서 타오르기 때문이다 아침보다는 귀가하는 새들의 모습이 더 정겹고 강물 위에 저무는 저녁 노을이 아름다운 것도 이제 하루 해가 끝났기 때문이다 사람도 올 때보다 떠날 때가 더 아름답다 마지막 옷깃을 여미며 남은 자를 위해서 슬퍼하거나이별하는 나를 위해 울지 마라 세상에 뿌리 하나 내려두고 사는 일이라면 먼 이별 앞에 두고 타오르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 이 추운 겨울 아침아궁이를 태우는 겨울 소나무 가지 하나가꽃보다 아름다운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 아니겠느냐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어둠도 제 살을 씻고 빚을 여는 아픔이 된다 - 문정희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업어준다는 것[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15〉

업어준다는 것[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15〉 나민애 문학평론가 입력 2021-10-02 03:00수정 2021-10-02 03:00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글씨작게글씨크게 저수지에 빠졌던 검은 염소를 업고 노파가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등이 흠뻑 젖어들고 있다 가끔 고개를 돌려 염소와 눈을 맞추며 자장가까지 흥얼거렸다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을 듣는다는 것 그의 감춰진 울음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 서로를 찌르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에 등줄기가 청진기처럼 닿는다는 것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 서로의 눈동자 속에 낀 슬픔을 닦아주는 일 흩어진 영혼을 자루에 담아주는 일 (하략) ―박서영(1968∼2018) 무릇 세상에는 안 해보면 모르는 일..

나는 나를 묻는다[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13〉

나는 나를 묻는다[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13〉 나민애 문학평론가 입력 2021-09-18 03:00수정 2021-09-18 03:00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글씨작게글씨크게 가을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풍성하고 화려했던 언어들은 먼 바다를 찾아가는 시냇물에게 주고, 부서져 흙으로 돌아갈 나뭇잎들에게는 못다 한 사랑을 이름으로 주고, 산기슭 훑는 바람이 사나워질 때쯤, 녹색을 꿈꾸는 나무들에게 소리의 아름다움과 소리의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거친 대지를 뚫고 새싹들이 온 누리에 푸르름의 이름으로 덮힐 때쯤 한곳에 숨죽이고 웅크려 나는 나를 묻는다 봄이 언 땅을 녹이며 땅으로부터 올라온다 ―이영유(1950∼2006) 우리가 이 시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가장 즉각적인 이유는 지금이 가을이라..

사람의 등불[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11〉

사람의 등불[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11〉 나민애 문학평론가 입력 2021-09-04 03:00수정 2021-09-04 03:00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글씨작게글씨크게 저 뒷울 댓이파리에 부서지는 달빛 그 맑은 반짝임을 내 홀로 어이 보리 섬돌 밑에 자지러지는 귀뚜리랑 풀여치 그 구슬 묻은 울음소리를 내 홀로 어이 들으리 누군가 금방 달려들 것 같은 저 사립 옆 젖어드는 이슬에 몸 무거워 오동잎도 툭툭 지는데 어허, 어찌 이리 서늘하고 푸르른 밤 주막집 달려가 막소주 한 잔 나눌 이 없어 마당가 홀로 서서 그리움에 애리다 보니 울 너머 저기 독집의 아직 꺼지지 않은 등불이 어찌 저리 따뜻한 지상의 노래인지 꿈인지 ―고재종(1957∼ ) ‘미스 트롯’같이 성공한 경연 대회를 보면 꼭 이런 장면이 나온다..

나는 나를 묻는다[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13〉

나는 나를 묻는다[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13〉 나민애 문학평론가 입력 2021-09-18 03:00수정 2021-09-18 03:00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글씨작게글씨크게 가을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풍성하고 화려했던 언어들은 먼 바다를 찾아가는 시냇물에게 주고, 부서져 흙으로 돌아갈 나뭇잎들에게는 못다 한 사랑을 이름으로 주고, 산기슭 훑는 바람이 사나워질 때쯤, 녹색을 꿈꾸는 나무들에게 소리의 아름다움과 소리의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거친 대지를 뚫고 새싹들이 온 누리에 푸르름의 이름으로 덮힐 때쯤 한곳에 숨죽이고 웅크려 나는 나를 묻는다 봄이 언 땅을 녹이며 땅으로부터 올라온다 ―이영유(1950∼2006) 우리가 이 시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가장 즉각적인 이유는 지금이 가을이라..

[최영미의 어떤 시] [37] 새로운 길

[최영미의 어떤 시] [37] 새로운 길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1.09.13 00:00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1917∼1945) 일러스트=양진경 지하철역 스크린 도어에 새겨진 ‘새로운 길’을 읽으며 나는 빙긋 웃었다. 지금은 보기 힘든 평화로운 농촌 풍경. 내를 건너 고개를 넘어 민들레와 까치를 지나 “아가씨가 지나고”에서 나는 멈추었다. 아가씨가 없으면 고요하고 심심한 전원시인데 아가씨가 들어가서 시가 살았다. 속도감 있는 시행의 배치도 세련되었다. 이처럼 단순한 시를 쓰고 ..

사람의 등불[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11〉

사람의 등불[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11〉 나민애 문학평론가 입력 2021-09-04 03:00수정 2021-09-04 03:00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글씨작게글씨크게 저 뒷울 댓이파리에 부서지는 달빛 그 맑은 반짝임을 내 홀로 어이 보리 섬돌 밑에 자지러지는 귀뚜리랑 풀여치 누군가 금방 달려들 것 같은 저 사립 옆 젖어드는 이슬에 몸 무거워 오동잎도 툭툭 지는데 어허, 어찌 이리 서늘하고 푸르른 밤 주막집 달려가 막소주 한 잔 나눌 이 없어 마당가 홀로 서서 그리움에 애리다 보니 울 너머 저기 독집의 아직 꺼지지 않은 등불이 어찌 저리 따뜻한 지상의 노래인지 꿈인지 ―고재종(1957∼ ) ‘미스 트롯’같이 성공한 경연 대회를 보면 꼭 이런 장면이 나온다. 낯선 가수가 노래를 시작한다. 첫 구절을 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