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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의 어떤 시] [27] 이소(離騷)

[최영미의 어떤 시] [27] 이소(離騷)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1.07.04 17:44 | 수정 2021.07.05 00:00 저는 아름다운 것에만 얽매여 아침에 충언을 올렸다가 저녁에 버림받았습니다(중략) 세상은 어지럽고 종잡을 수 없으니 제가 어찌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있겠습니까? 난초와 백지(향초의 이름)는 동화되어 더 이상 향기롭지 않고, 창포와 혜초도 보잘것없는 억새풀이 되었습니다. 예전의 향기로운 풀들이 지금은 어찌 저 냄새나는 쑥이 되었습니까? (중략) 난초는 믿을 수 있다고 여겼건만 어찌 속은 비고 겉만 아름다운 것입니까? (후략) -굴원(屈原 기원전 353?∼278년) (권용호 옮김) 일러스트=백형선 ‘이소’는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정치가이며 중국 최초의 시인이라고 알려..

[최영미의 어떤 시] [25] 6월의 언덕

[최영미의 어떤 시] [25] 6월의 언덕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1.06.21 00:00 아카시아꽃 핀 6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들다 이 인파 속에서 고독이 곧 얼음모양 꼿꼿이 얼어 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보리밭엔 양귀비꽃이 으스러지게 고운데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해볼 사람은 없어 (…) 장미가 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사슴이 말을 안 하는 연유도 알아 듣겠다 (…) -노천명(盧天命 1912∼1957) 아카시아 꽃 못 본 지 한참 되었다. 세검정 골짜기에 울창한 아카시아 잔가지를 손으로 툭툭 건드려 꺾으며, 누구께 잎이 많이 달렸나? 친구와 내기를 하며 산길을 내려왔다. 아카시아 우거진 학창 시절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

[산모퉁이 돌고 나니] 두메산골 물처럼 흐르는 사람들

[산모퉁이 돌고 나니] 두메산골 물처럼 흐르는 사람들 이주연 산마루교회 목사 입력 2021.06.18 03:00 “목사님, 목사님이랑 인연을 끊든지 해야지, 내가 못살겠어요! 아직도 파종을 못 하고 있으니….” “아니, 인연이 끊으면 끊어지고 이으면 이어지나요! 비가 오니 어떻게 밭에서 돌을 거둬내나요?” /일러스트=박상훈 2019년 평창에서 농사를 시작한 봄부터 트랙터로 쟁기질을 해주고 로터리를 쳐주는 평창 농부 김씨의 전화다. 그는 트랙터 다루는 기술이나 감자 농사에서는 평창 제일 가는 농부다. 내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유기농 미생물 농법을 한다고 퇴비도 쓰지 않으니, 그러다 망한다고 걱정이 태산이다. 밭을 부쳐 먹으려면 밭도 제대로 만들고, 때맞춰 퇴비를 깔아주고, 씨 뿌리고, 비료도 제때 주라고..

[삶의 향기] 지혜로운 자는 말하지 않고…

[삶의 향기] 지혜로운 자는 말하지 않고… [중앙일보] 입력 2021.06.15 00:26 PDF인쇄기사 보관함(스크랩)글자 작게글자 크게 SNS 공유 및 댓글SNS 클릭 수2카카오톡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스토리SNS 공유 더보기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과 교수 흔히 듣게 되는 ‘칼보다 무서운 펜’이라는 말이 있다. 말 한마디로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그 무게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말하지 않는 자는 지혜롭다” ‘칼’보다 무서운 ‘말’의 힘 지킬 마음 없인 약속하지 말라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은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언어학자들 가운데에서도 화행론(話行論)자들은 말이 가지는 행동력, 즉 말로 표현하게 됨으로써 그에 수반되는 힘과 효력을 연구대상으로 한다. 쉬운 예로 ‘약속하다’라는 말..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산속에서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산속에서 나민애 평론가 입력 2015-11-20 03:00수정 2015-11-20 04:57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글씨작게글씨크게 산속에서 ―나희덕(1966∼ ) 길을 잃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속에서 밤을 맞아 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 주는지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누가 누가 잘하나’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아이들이 나와서 동요를 부르는 방송인데 잘 불러서 예쁘고, 가끔 잘 못 불러도..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정희성(1945∼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나민애 문학평론가 입력 2017-01-06 03:00수정 2017-01-06 03:00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글씨작게글씨크게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정희성(1945∼ )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이제 2017년이다. 새해가 되었다지만 엄청나게 실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떡국 한 그릇, 달력의 표시..

[최영미의 어떤 시] [22] 소네트 66

[최영미의 어떤 시] [22] 소네트 66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1.05.31 00:00 이 모든 것에 지쳐 휴식 같은 죽음을 원하니, 가치 있는 사람이 가난하게 태어난 걸 보고 (…) 황금빛 명예는 부끄럽게도 잘못 주어지고 순진한 처녀는 함부로 매춘에 내몰리고 올바른 완성은 부당하게 망신당하고 힘은 모자란 것의 방해를 받아 불구가 되고 예술은 권력에 혀가 묶였고 (…) 이 모든 것에 지쳐, 세상을 떠나고 싶어 죽는 것이 내 사랑을 홀로 남겨두는 게 아니라면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문과 행을 다르게 배열했음) 불공정을 비판한 소네트(sonnet: 14줄의 운을 맞춘 시). 셰익스피어도 부당하게 망신당하고 그의 예술도 평이한 작품이라는 오해를 받았다니. 세상사에 지쳤으나 아직 세상을 비판..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세상의 모든 훈련병 엄마들을 위하여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세상의 모든 훈련병 엄마들을 위하여 코로나로 사라진 입소식… 훈련소 앞에 택배처럼 아들만 떨궈야 첫 일주일 잘 견디면 18개월이 거뜬… ‘통신보약’ 놓치지 말길 ‘군화모’서 깨알 정보 얻고 하루 만보 걸으며 아들들 응원합시다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입력 2021.05.27 03:00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달 초 만 20세 아들을 대한민국 육군 현역으로 입대시킨 훈련병모(母) 김아무개입니다. 눈만 뜨면 국방부 시계가 제대로 가는지 점검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26일 현재 전역까지 532일 하고도 9시간 14분 28초가 남았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글은 쓸 줄 모르지만, 아들 입대를 앞두고 잠 못 이룰 어머니들께 작은 쓸모가 되고자 용기를 냈습니다. 입영 3주 차 훈병모가 군대에 대해 ..

[ESSAY] 돈으로 깨달은 것들

[ESSAY] 돈으로 깨달은 것들 딸이 건넨 봉투에 “네가 무슨 돈을…” 하시던 어머니 함박웃음에 ‘행복도 돈이 드네’ 웃던 짠순이 딸, 지인에 돈 빌려줬다 속앓이 청포도·치킨 못 산 장바구니엔 푸성귀… 인생 진리도 돈에 깨닫네 이주윤 작가 입력 2021.05.25 03:00 돈이 좋다. 돈이 있으면 맨밥에 김치 올려 끼니를 때우는 대신 요즘 유행하는 로제 떡볶이를 사 먹을 수 있고, 친구가 비싼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할 때 밥값은 누가 내나 절절맬 필요 없이 화끈하게 한턱 낼 수도 있다. 혹자는 제아무리 돈이 좋다 한들 행복까지 살 수 없는 노릇이라 외치기도 하지만 아니, 나는 분명 보았다. 오래간만에 집에 내려간 딸내미를 시큰둥하게 대하다가도 흰 봉투를 건네받자 함박웃음을 지으시던 내 어머니의 얼굴을...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국수가 먹고 싶다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국수가 먹고 싶다 동아일보 입력 2015-10-16 03:00수정 2015-10-16 03:00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글씨작게글씨크게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1946∼)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가을이 되면 소개해야지, 이런 생각으로 지금까지 넣어 두었던 시가 이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