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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의 어떤 시] [28] 음주(飮酒) (제9수)

[최영미의 어떤 시] [28] 음주(飮酒) (제9수)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1.07.12 00:00 음주 (飮酒) (제9수 시 전문) 맑은 아침에 문 두드리는 소리 듣고 허겁지겁 옷 뒤집어 입고 나가 문을 열어 그대 누구인가 묻는 내 앞에 얼굴 가득 웃음 띤 농부가 서있다 술단지 들고 멀리서 인사 왔다 하며 세상을 등지고 사는 나를 나무란다 남루한 차림 초가집 처마 밑에 사는 꼴은 고아한 생활이라 할 수 없노라고 온 세상 사람 모두 같이 어울리기 좋아하거늘 그대도 함께 흙탕물을 튀기시구려 노인장의 말에 깊이 느끼는 바 있으나 본시 타고난 기질이 남과 어울리지 못하노라 말고삐 틀고 옆길로 새는 법 배울 수도 있으나 본성을 어기는 일이니, 어찌 미망(迷忘)이 아니리요? 자, 이제 함께 가지고..

흐린 저녁의 말들[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08〉

흐린 저녁의 말들[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08〉 나민애 문학평론가 입력 2021-08-14 03:00수정 2021-08-14 03:00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글씨작게글씨크게 따뜻한 눈빛만 기억해야 하는데 경멸스런 눈빛만 오래도록 남았네 얼크러진 세월이 지나가고 근거 없는 절망 우울한 거짓말이 쌓이고 나는 그 말을 믿네 가난하고 고독한 건 그리 슬픈 일이 아니라네 진짜 슬픈 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 용기도 헌신도 잃어버렸다는 것 잊힌 사람이 되었다는 것 무수하게 사라지는 저항의 말들 어디서나 기억에도 없는 낯선 얼굴들 당신의 존재를 견딜 수 없는 흐린 저녁이 오고 중력을 잃은 바람은 나를 데려가지 않네 (후략)임성용(1965∼) 임성용 시인의 시를 한 편 소개한다. 사실 미리 꼽아두었던 시들은 ..

[백영옥의 말과 글] [213] 꽃길만 걷자는 말

[백영옥의 말과 글] [213] 꽃길만 걷자는 말 백영옥 소설가 입력 2021.08.14 00:00 선물로 받은 선인장이 죽었다. 긴 시간 관심을 쏟았지만 결국 뿌리가 썩어버렸다. 식물을 오래 키워왔지만 잘 키우는 식물이 있는 반면 내게 오면 시들어 말라버리는 것들도 있다. 율마, 로즈마리가 그랬고, 선인장도 그렇다. 기온이 37도까지 오르던 날,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시다가 햇빛이 쏟아지는 창가 곁의 선인장을 보았다. 선인장은 물을 적게 주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한여름 태양이 선인장에게도 가혹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평소보다 물을 더 주었다. 얼마 후, 선인장은 쓰러지고 말았다. 명문대에 입학해 졸업반인 선배의 딸 이야기를 들었다. 취업을 앞둔 아이가 방황 중이라는 것이다...

[산모퉁이 돌고 나니] 이젠 멈춰 상처입은 서로를 바라보자

[산모퉁이 돌고 나니] 이젠 멈춰 상처입은 서로를 바라보자 이주연 산마루교회 목사 입력 2021.08.13 03:00 옥중에서 편지가 왔다. 아주 두툼하다. 봉투부터 손 글씨로 쓴 주소가 컴퓨터로 쓴 듯 반듯하다. 알고 보니 감사하게도 ‘산모퉁이 돌고 나니’를 읽고 편지를 띄웠다 한다. 그는 옥에 갇혔으나 칼럼을 읽고 “널브러진 심령에 용기가” 났다는 고백이다. 편지를 열어보니 긴 사연과 성경을 몇 십 장 필사하여 동봉했다. 그 많은 양을 그토록 바르고 깨끗하게 쓰려면 얼마나 정성을 다하였을까! 사연을 읽어 보니 지난날을 돌이키고 있다. 지난날 무절제로 인한 실패, 결국 노숙 생활과 알코올중독, 그리고 불행하게도 “죄인 되어 부끄러운 생활” 중이라는 아픈 이야기가 하얀 종이에 반듯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최영미의 어떤 시] [30] 강촌(江村)

[최영미의 어떤 시] [30] 강촌(江村)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1.07.26 00:00 마을을 안아 강이 흐르는데 긴 여름의 대낮 한가롭기만! 제비는 멋대로 처마를 나들고 갈매기는 가까이 가도 날아갈 줄 모른다 할멈은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고 애놈은 바늘을 두들겨서 낚시를 만들고 있다 병 많은 몸 요긴키는 오직 약이니 이 밖에야 무엇을 또 바라랴? -두보(杜甫 712∼770) (이원섭 옮김) 일러스트=송수현 한가로운 여름 한낮의 정취를 담담하게 묘사한 한 폭의 그림 같은 시. 기교를 부리지 않은 듯 정교하게 짜인 작품이다. “마을을 안고”(抱村) 푸른 강이 흐른다. 2행의 ‘사사유(事事幽)’도 기막히다. 事를 겹쳐놓아 한가로움을 강조하며 동시에 7언을 완성했다. 3행의 ‘자거자래(自去自來..

별이 빛나는 감나무 아래에서[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07〉

별이 빛나는 감나무 아래에서[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07〉 나민애 문학평론가 입력 2021-08-07 03:00수정 2021-08-07 04:48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글씨작게글씨크게 아버지는 가을이 깊어지면 감 따러 오라고 성화를 부렸다 나는 감 따는 게 싫어 짜증을 냈다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아느냐고 감 따위 따서 뭐 하냐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다시 가을이 왔을 때 엄마는 내게 말했다 니 애비도 없는데 저 감은 따서 뭐 하냐 나는 별이 빛나는 감나무 아래에서 톱을 내려놓고 오래도록 울었다-피재현(1967∼) 시를 읽으러 오신 분들은 모두 시의 손님이다. 손님께는 물 한 잔이라도 정성껏, 맑은 차라도 계절에 맞게 드리는 법. 그래서 봄에는 꽃과 나비의 시를, 겨울에는 흰 눈과 쓸쓸함을 준비하곤 ..

달빛이 참 좋은 여름밤에[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05〉

달빛이 참 좋은 여름밤에[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05〉 나민애 문학평론가 입력 2021-07-24 03:00수정 2021-07-24 03:00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글씨작게글씨크게 달빛이 참 좋은 여름밤에 들일을 하고 식구들 저녁밥을 해주느라 어머니의 여름밤은 늘 땀에 젖어 있었다 한밤중 나를 깨워 어린 내 손을 몰래 붙잡고 등목을 청하던 어머니, 물 한바가지 끼얹을 때마다 개미들이 금방이라도 부화할 것 같은 까맣게 탄 등에 달빛이 흩어지고 있었다 우물가에서 펌프질을하며 어머니의 등에 기어다니는 반짝이는 개미들을 한마리씩 한마리씩 물로 씻어내던 한여름 밤 식구들에게 한번도 약한 모습 보이지 않던 어머니는 달빛이 참 좋구나 막내 손이 약손이구나 하며 시원하게, 수줍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요즘은 카톡을 시..

[자작나무 숲] 도스토옙스키는 왜 사회주의에 반대했는가

[자작나무 숲] 도스토옙스키는 왜 사회주의에 반대했는가 부르주아 정신 혐오한 도스토옙스키, 사회주의 줄곧 반대해 전체주의 제도 노예 되길 거부하고 개인 정신의 자유 선택 민중의 혁명 대신… ‘서로 사랑하라’ ‘고통 나누라’ 역설 김진영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입력 2021.07.22 03:00 “자유라는 것과 누구에게나 넘쳐날 만큼의 지상의 빵은 양립할 수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대작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대심문관이 예수에게 하는 말이다. 종교재판이 횡행하던 16세기 스페인에 예수가 재림하자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치유의 기적을 간청한다. 눈먼 자가 눈 뜨고 죽은 아이가 되살아나는데, 그때 대심문관인 추기경이 나타나 예수를 체포하고 화형에 처하고자 한다. 죽이려는 이유는 이렇다. 대다수 인간..

[최영미의 어떤 시] [28] 음주(飮酒) (제9수)

[최영미의 어떤 시] [28] 음주(飮酒) (제9수)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1.07.12 00:00 아침에 문 두드리는 소리 듣고 허겁지겁 옷 뒤집어 입고 나가 문을 열어 그대 누구인가 묻는 내 앞에 얼굴 가득 웃음 띤 농부가 서 있다 술단지 들고 멀리서 인사 왔다 하며 세상을 등지고 사는 나를 나무란다 남루한 차림 초가집 처마 밑에 사는 꼴은 고아한 생활이라 할 수 없노라고 온 세상 사람 모두 같이 어울리거늘 그대도 함께 흙탕물을 튀기시구려 노인장의 말에 깊이 느끼는 바 있으나 본시 타고난 기질이 남과 어울리지 못해 (중략) 술이나 마시고 즐깁시다 나의 길은 되돌릴 수 없겠노라 -도연명(陶淵明 365∼427) (장기근이 옮긴 시를 발췌함) /일러스트=양진경 묻고 답하는 내용이 굴원(屈原..

[백영옥의 말과 글] [208] 선물에 대하여

[백영옥의 말과 글] [208] 선물에 대하여 백영옥 소설가 입력 2021.07.10 00:00 치약을 선물받았다. 약속한 날을 잘못 기록한 친구가 약속 장소에 나오지 못해 미안하다며 건네준 선물이었다. 계면 활성제가 없어 유독 거품이 잘 나지 않는 이 치약은 색깔마저 보라색이라, 이를 닦고 보라색 거품을 뱉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 친구를 생각했다. 4년 전, 나의 첫 번째 명상 수업에서 선생님이 내 준 숙제 중 하나는 가장 일상적인 일을 가장 정성스럽게 하기였다. 목록 중에는 ‘의식하면서 칫솔질하기’와 ‘의식하면서 밥 먹기’ 같은 것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정말 어려운 과제였다. 습관적인 칫솔질을 ‘의식적’으로 바꾸자 명백히 깨달은 게 있다. 화풀이하듯 내가 너무 세게 이를 닦는다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