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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 보드카가 그립다

최만섭 2021. 12. 28. 05:17

[자작나무 숲] 보드카가 그립다

한국의 국민주 소주, 러시아 국민주 보드카 공통점은 무색·무취·무미
‘러시아 모든 정직한 사람들은 절망해서 마셨다’… 아픔과 자책의 술
술 소비량 절반으로 준 오늘의 러시아, 고뇌하는 지식인 사라진 걸까

입력 2021.12.28 03:00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라는 술이 이토록 순결하고 서정적이어도 되는가. 백석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서 술은 자족적 상상력의 촉매제다. 남자는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그는 사랑하는 나타샤와 깊은 산골로 가 살 것이고,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일 뿐이다. 나타샤와 흰 눈에는 보드카가 제격이련만, 시인은 소주를 선택했다. 하긴 웍카(보드카)·와인·맥주·청주·막걸리, 그 어떤 술보다도 그 자리엔 소주가 어울린다.

한국의 국민주인 소주와 러시아 국민주 보드카는 둘 다 무색, 무취, 무미의 주종이다. 보드카(vodka)는 곡물을 발효해 얻은 주정(에탄올)에 물(voda)을 섞어 만드는데 제조 과정, 맛, 성질이 비슷한 소주가 경쟁주로 비교되곤 한다. 러시아에서도 소주는 ‘한국의 보드카’로 소개되어왔다. 그러나 소주와 보드카가 다른 점이 있다. 백석의 러시아 정경에 보드카가 끼어들 수 없는 이유다. 요컨대 보드카는 ‘혼술’ 하지 않는다. 홀짝거리지 않는다. 여럿이 기분 좋게 ‘원샷’ 하는 술이어서, 혼자 따라 마시는 법 없이 다 함께, 건배사를 곁들여 털어 넣듯 들이켠다. 보드카는 속도와 결단력이 필요한 술이다. 만약 누군가 혼자서 오래 잔을 쥐고 있다면, 알코올중독자일 가능성이 크다.

/일러스트=이철원

보드카에는 의식(儀式)이 따른다. 얼음같이 차야 하고(서리 낀 술병으로부터 투명 액체가 진득진득 흘러나올 때의 그 맛), 반드시 건배 후에 마시고(단, 마신 다음 빈 잔을 뒤로 던져 깨뜨리지는 말 것), ‘자쿠스카’(한 입 깨물 안주)가 필요하다. 40도 이상짜리 독주를 원샷 한 직후에는 일단 숨을 내뱉고 뭔가 입에 넣어야 하는데, 러시아 안주의 정수가 소금에 절인 오이다. 한국식 오이지 비슷한, 술 좀 하는 사람에게는 금방 이해될 시큼한 맛이다. 그래서 김치 역시 훌륭한 보드카 안주가 된다. 90년대 중반경 페테르부르크에서 1년 지낼 때 연구소 원로 학자 몇 분을 숙소로 초대해 대접한 적이 있다. 술과 재담과 시가 넘쳐 흐르던 모임 끝 무렵, ‘후식’으로 김칫국을 준비했다. 아니나 다를까, 국 냄새를 맡는 순간 손님들이 다시 보드카를 찾으며 열광하는 것이었다. 오래전, 소련 지식인과 보드카의 낭만이 좁디좁은 부엌 벽에 스며 있던 시절 얘기다.

 

그런데 보드카는 원래 슬픈 술이다. 대략 500년으로 어림잡는 러시아 보드카의 역사는 민중과 지식인과 지배자의 역학 관계 안에서 형성되었다. 혁명 이전부터 소련 붕괴 시점까지 보드카는 내내 국가 독점 산업이었고, 푸틴이 집권한 현재에도 최대 보드카 사업체는 국영기업(Rosspritprom)이다. 주권(酒權)을 거머쥔 권력자가 민중의 일상을 장악해 자신의 곳간을 채우는 교묘한 통치 수단 중 하나가 보드카였다. 가난하고 몽매한 민중은 통치자와 지배계급의 당근-채찍에 길들어갔다. 고기를 먹을 수 없기에 술을 마시고, 책을 읽을 수 없기에 술을 마시는 현실에 대해 19세기 급진 지식인 피사례프는 개탄했다. 민중은 고통을 잊기 위해 마시고, 다른 기쁨이 없어 마시고, 그다음엔 습관으로 마셨다. 아편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지식인은? 술에 중독된 민중의 무질서를 꿰뚫어 본 지식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비관했다. 보드카는 아픔의 술이자 자책의 술이었다. ‘러시아의 모든 정직한 사람들은 절망해서, 절망적으로 마셨다’고 브레즈네프 시대의 술꾼 소설가 예로페예프는 쓰고 있다. 도스토옙스키 소설 ‘악령’의 허무주의자 지식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러시아의 모든 재능 있고 선구적인 사람들은 유형수 아니면 실컷 퍼마시는 술주정뱅이입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2010년대까지도 러시아는 1인당 한 해 소비량 18L의 ‘술 취한 국가’였는데, 2021년 와서는 10.5L로 낮아졌다. 젊은 층은 맥주와 와인을 선호하고, 엘리트 ‘신러시아인’은 아예 술을 멀리하는 추세라 한다. 러시아가 변해간다. 푸틴의 금주 캠페인 덕분일까? 스탈린의 저 유명한 표현대로 ‘살기가 나아지고 즐거워졌다’는 의미일까? 고뇌하는 지식인이 사라진 걸까?

보드카를 좇아 마시며 러시아의 혼돈을 이해하려 애쓰던 옛날이 한편으로 그립다. 그때를 위하여 오랜만에 한잔 했다. 소련 시절 주조된 ‘황금 고리’라는 보드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