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동서남북] 좋은 연극은 훈계하지 않는다

최만섭 2022. 3. 4. 04:56

[동서남북] 좋은 연극은 훈계하지 않는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관객 스스로 반성하게 한다
희극배우 출신 우크라 대통령 “도피 아닌 탄약 필요” 큰 감동

입력 2022.03.04 03:00
 
 
 
 
 
연극 '리차드3세'에서 악인 중의 악인을 연기한 배우 황정민. /샘컴퍼니

대학 연극반 시절에 무대는 하늘 같았다. 흙발로는 절대 올라갈 수 없는 곳이었다. 이유 없이 무대를 가로지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군인이 총기를 손질하듯이, 피아니스트가 건반의 얼룩을 제거하듯이, 우리는 무대를 자주 쓸고 닦았다. “배우는 가장 깨끗한 수건으로 무대를 닦고 가장 더러운 걸레로 자신의 몸을 닦는다”는 말이 거룩하게 들렸다.

‘거꾸로 말하기’가 연극의 매력이다. 연극을 정의하는 고전적 수사는 ‘연극은 세상의 거울’이라 말하는 것이다. 거울 속 세상은 좌우가 뒤집혀 있다. 리어왕이 스스로 정상이라 믿었을 때는 사리를 판단하지 못하다가 배신당하고 미쳐버렸을 때 비로소 진실에 눈을 뜨듯이, 연극은 거꾸로 비추어 바로 보게 하는 모순 어법을 사용한다. 무대에 등장한 배우가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 훈계한다면 얼마나 따분할 것인가. 잘 구운 연극은 무대에 혼돈을 던져놓고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를 관객 스스로 반문하게 한다.

5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개막하는 ‘회란기(灰闌記)’는 중국 원나라 때 이야기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여인 장해당은 동네 갑부 마원외의 첩이 돼 아들을 낳는다. 그런데 본처 마부인은 불륜남과 작당해 남편을 독살하고 장해당에게 뒤집어씌운다. 재산까지 노린 마부인은 장해당의 아들을 자기 아들이라 주장하며 산파와 이웃에게 위증을 청탁한다. 정의를 손바닥처럼 뒤집고 진실도 매수하는 우리 시대를 후려치는 연극이다.

최근 폐막한 ‘리차드3세’에서 셰익스피어는 말재주와 꾀, 권력욕으로 무장한 악마를 그려냈다. 꼽추 리차드3세(황정민)는 객석을 향해 히죽거린다. “난 지금부터 훌륭한 배우가 되겠어. 웃으면서 눈물도 흘리면서 유쾌하게 엄격하게 때론 사랑스럽고 때론 마초적으로. 세상을 속일 명연기로도 저 왕관을 차지할 수 없다면, 그땐 좀 더 악해지면 되겠지. 우선 다리를 절면서 동정을 사야겠다.” 흉한 소문을 퍼뜨려 형들을 찢어놓은 그는 조카들을 죽이고 왕을 참칭한다.

 

‘회란기’는 700년 전, ‘리차드3세’는 400년 전에 쓰였다. 지금 다시 공연되는 까닭은 뭘까. 불행히도 세상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자주 더 충격적으로 말문이 막힌다. 연극에서 거짓은 결국 탄로나고 부정한 사람들이 벌을 받지만 현실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도둑이 도리어 매를 들기도 한다. ‘회란기’ 연출가 고선웅 말마따나 “세상이 좀 덜 살벌하고 더 상식적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절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현실의 비극이다. 거의 모든 나라가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44)라는 흠모할 만한 지도자도 등장했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희극 배우 출신으로 ‘무능한 정치 초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 이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미사일과 포탄이 날아드는 수도에 잔류하며 결사 항전 중이다. 피신을 돕겠다는 미국의 제안을 거절하며 그가 한 말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싸움이 한창이다. 나는 도피가 아니라 탄약이 필요하다(The fight is here. I need ammunition, not a ride).”

젤렌스키는 주권과 자유를 지키려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구심점이다. 세계적 연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침마다 밤새 그가 무사한지 확인하는 게 루틴이 되었다는 사람이 많다. 저 한마디가 어느 연극이 들려준 명대사보다 큰 감동을 준다. 진정한 위대함은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자신에 대해 엄격한 데서 나온다. 젤렌스키의 리더십을 보며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귀하고 드문 것인가를 생각한다.

2월 28일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러시아 규탄 시위에서 한 참가자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아돌프 히틀러 나치독일 총통에 빗댄 사진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영웅으로 표시한 팻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