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발자취] 창의적 르네상스맨 “새하얀 눈길, 첫발 찍는 재미로 살았다”

최만섭 2022. 2. 28. 05:05

[발자취] 창의적 르네상스맨 “새하얀 눈길, 첫발 찍는 재미로 살았다”

이어령 초대 문화부장관

입력 2022.02.28 03:00
 
 
 
 
 

문화부 초대 장관을 지낸 이어령(88)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가 26일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고인은 문학평론가, 언론인, 교수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대표 석학이자 우리 시대의 지성으로 불렸다. 노태우 정부 때 신설된 문화부 초대 장관(1990~1991)을 지냈고 예술원 회원(문학평론)으로 활동했다.

1934~2022 - 이어령 전 이화여대 교수가 26일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2016년 본지 인터뷰 당시 모습.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어령은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국문학과 재학 중이던 1956년 문학평론가로 등단한 뒤 인문학 전반을 아우르는 예봉을 휘두르며 100여 권의 저서를 냈다. 그는 스물둘 나이에 기성 문단을 통렬히 비판하는 평론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며 지식 사회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당대의 문인들을 “무지몽매한 우상”이라 일컬으며 지식의 정확성을 요구했고, 1960년대 후반 김수영 시인과 조선일보와 사상계 지면을 오가며 ‘순수참여 문학’ 논쟁을 이끌었다. 이어령은 “문학의 가치는 정치적 불온성 유무로 재판할 수 없다”며 순수 문학의 편에서 참여 문학을 비판했다.

생전 언론 인터뷰에서 “새하얀 눈길에 첫발 찍는 재미로 살았다”고 말한 그의 삶은 창의적 르네상스맨으로 요약된다. 또 “짧게 말하겠다”면서도 홀로 서너 시간은 족히 쏟아내는 달변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했던 이야기꾼이기도 했다. 1963년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펴내며 윷놀이, 돌담, 팽이채 같은 친숙한 소재를 활용해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향하는 한국 문화의 단면을 날카롭게 포착했고, 1982년 ‘축소 지향의 일본인’에선 하이쿠와 분재, 쥘부채 등에 공통으로 나타난 ‘축소 지향’으로 일본 사회의 심층을 분석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을 총괄 기획하며 개회식 마무리에 침묵 속에 굴렁쇠를 굴리는 소년을 내세우기도 했다. 한국적인 정적과 여백의 미학과 더불어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성공한 나라의 자부심을 세계에 각인시킨 명장면이었다.

이어령은 타계 나흘 전인 지난 22일 이 시를 남겼다. 2012년 세상을 떠난 맏딸 이민아 목사를 기리는 자신의 시집‘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열림원)의 서문이다. 내달 15일이 이 목사 10주기다.

이어령은 1990년 문화부 장관에 취임한 뒤 국립국어원을 세워 언어 순화의 기준을 제시했다. 그는 “장관으로서 가장 잘한 일은 ‘노견(路肩)’이란 행정 용어를 ‘갓길’로 바꾼 것”이라고 자평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을 설립하며 문화적 기틀을 쌓았다.

 

고인은 교사·교수, 문예지 발행인, 신문사 논설위원 등 10여 개가 넘는 직함을 거칠 정도로 다재다능한 르네상스형 인간이었다. 기술과 인간, 과거와 미래의 화합은 고인이 천착한 주제였다. 2000년대 정보화 사회에 ‘디지로그(digilog)’란 개념을 주창하며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공존을 모색했고, 2010년대 산업화와 민주화의 다음 과제로 ‘생명’을 꼽으며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새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2017년 암이 발견돼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항암치료를 받는 대신 마지막 저작 시리즈 ‘한국인 이야기’ 등 저서 집필에 몰두했다. 그의 서재엔 7대의 컴퓨터와 2대의 스캐너 등 디지털 장비가 즐비했다. 아내 강인숙 건국대 명예교수는 “집에 오면 늘 컴퓨터에 파묻혀 글을 썼고, 몸이 성치 않으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빌려서라도 원고를 써냈다”고 회상했다. 장남 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차남 이강무 백석대 교수 등 2남 1녀를 뒀다. 이어령은 2012년 맏딸 이민아 목사를 암으로 잃고서 기독교에 귀의해 “지성의 종착역은 영성(靈性)”이라 말했다. 최근 출간된 책 ‘메멘토 모리’(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는 고인이 생전 즐겨 말하던 라틴어 낱말이었다. 그는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란 말을 남겼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마련됐다. 문재인 대통령·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을 비롯해 소설가 박범신·김홍신·유현종, 시인 이근배·신달자, 음악가 안숙선·김덕수 등 각계 인사들이 빈소를 찾았다. 발인은 2일 오전 8시30분. 영결식은 같은 날 오전 10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별도로 문화체육관광부장(葬)으로 엄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