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아무튼, 주말] 한국의 미켈란젤로가 남긴 걸작, 눈 치켜뜬 여자아이가 보이나요?

최만섭 2022. 2. 19. 11:16

[아무튼, 주말] 한국의 미켈란젤로가 남긴 걸작, 눈 치켜뜬 여자아이가 보이나요?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격랑의 시대, 끈기의 아이콘
‘북으로 간 비운의 화가’ 이쾌대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입력 2022.02.19 03:00
 
 
 
 
 
인간 군상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이쾌대의 대작 ‘군상 4’. 1948년 추정. 개인 소장.

이쾌대의 ‘군상’이라는 작품이 있다. 처음 이 작품을 직접 본 곳은 1998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이었는데, 물론 착각이겠지만, 당시 전시실 공기까지도 기억이 날 것만 같다. 그만큼 이 작품은 내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2019년 같은 작품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다시 전시했는데, 방탄소년단 리더 RM이 보고 마찬가지로 충격 받은 눈치였다. “아, 어떻게 이런 작품이… 미켈란젤로 같아요”라고 그가 말했을 때 내심 반가웠다. 1940년대 이쾌대의 별명이 ‘한국의 미켈란젤로’였기 때문이다.

이쾌대! 그는 누구이기에 1940년대 후반, 한반도가 이념 갈등과 사회 혼란으로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용감하게도 이런 대작을 그렸을까? 그 처참한 시대를 어떻게 이다지도 은유적인 듯 적나라하게 그려냈을까? 그의 강인한 정신세계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쾌대,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1940년대 후반, 개인소장.
이쾌대 사진, 1940년대 후반 촬영, 개인소장 .

◇1940년대 촉망받던 신예 화가

이쾌대는 1913년 경북 칠곡(현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단한 부잣집 출신이다. 부친은 여러 지역 현감(현 군수)을 지냈고, 조부는 금부도사였다. 조부의 직업상 집이 궁에서 가까워야 했기에 서울 중학동(현재 경복궁 근처 트윈트리타워 자리)에 하인 50명을 거느린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쾌대도 초등학교만 대구에서 졸업한 후 상경하여 휘문고보를 다녔다.

이쾌대의 형은 유명한 언론인·학자·정치인 이여성(1901~?)이었다. 이여성은 부잣집 아들답게 독립운동을 해도 스케일이 컸다. 서울에서 중앙고보를 졸업하자마자, 1918년 집안 재산 6만원을 훔쳐서 만주로 독립운동을 하러 갈 정도였다. 문예 전반에도 다재다능했던 이여성은 결국 일본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동생 이쾌대만큼은 그토록 하고 싶어 하는 미술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쾌대는 휘문고보에서 당시 이웃해 있던 진명여고보 출신 유갑봉과 연애에 성공, 결혼하여 함께 일본에서 유학했다.

일본 유학 시절의 이쾌대. 사진 가운데 생일 모자를 쓴 사람이 이쾌대이고, 앞줄에서 이쾌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부인 유갑봉이다. 개인 소장.

도쿄제국미술학교 재학 시절, 이쾌대는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고, 큰 전람회에 입선하며 화가로 인정받았다. 이 시기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보인다. 사진을 보면, 일본인 학생들과 어울려도 거의 항상 ‘센터’에 있다. 그는 얼굴도 잘생기고, 성격도 밝고 긍정적이며, 각종 스포츠에도 탁월했기에, 모두가 좋아할 만한 ‘인싸형’ 인물이었다. 졸업 후 귀국해서도 1940년대 가장 촉망받는 신예 화가로 성장했다. 당시 그의 작품을 보면, 고구려 고분벽화를 연상시키는 웅혼한 조선의 미학과, 강렬하고 주관적인 색채를 강조하는 서양의 야수파 기법이 절묘하게 융합되어 있다.

이쾌대 부부의 단란한 한때를 그린 ‘카드놀이하는 부부’. 1930년대. 개인 소장.
이쾌대, ‘소녀상’. 1940년대. 소녀의 모습을 매우 모던하게 표현했다. 개인 소장.

◇혼란 속에서 탄생한 ‘군상’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찾아왔다. 해방이 되면 모든 것이 잘될 줄 알았건만, 한반도는 상상도 하지 못한 극심한 혼돈 상태에 빠졌다. 이쾌대의 형 이여성은 정치인 여운형의 오른팔로 건국준비위원회 조직에 힘썼다. 그러나 여운형 세력은 좌우익 통합을 도모하다가 실패를 거듭한 뒤, ‘근로인민당’을 독자적으로 결성하여 중도 좌파의 길을 걸었다. 그 과정에서 좌파와 우파 모두에서 맹비난을 받으며 정치적으로 설 자리를 잃어갔다. 1947년 7월 여운형은 암살당했고, 이듬해 이여성은 월북했다.

미술계도 조선미술가협회와 조선프롤레타리아미술동맹으로 대변되는 양대 조직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점차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쾌대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미술문화협회’라는 제3 단체를 새로 결성했다(1947년 6월). 그러나 신진 화가들이 대거 참여한 이 단체는 좌익 세력에서 ‘반동’으로 규정되어 힐난을 받았다. “미술 운동을 착란(錯亂)하는 근인당(근로인민당) 일파의 책동을 분쇄하자”는 조선미술동맹의 담화문이 신문 지상에 크게 실렸다. “이쾌대 등 일파”는 “분열 책동”의 주동자로 몰렸다.

이런 상황에서 작품 ‘군상’이 탄생했다. 스토리텔링은 화면 오른쪽에서 시작된다. 남녀노소 다양한 나체 인물들이 서로 뒤엉켜 물고 뜯고 때리고 싸운다. 오른쪽 구석의 사내아이는 겁에 질려 관객을 바라본다. 화면 뒤 돌로 사람을 내리쳐 살해를 기도하는 두 인물은 구약에 등장하는 ‘카인과 아벨’을 연상시킨다. 화면 가운데에는 핏기 잃은 여성 시체가 한 남성의 팔에 감겨 끌려간다. 처참한 장면이다.

그런데 화면 왼쪽으로 갈수록, 처절하게 무너진 군상을 뒤로한 채 꿋꿋이 앞을 향해 나아가는 소수의 인물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한 사내아이와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발걸음을 옮기는 여자아이가 보이는가? 이 아이는 눈을 치켜뜨고 입술을 꽉 다문 채 골똘히 집중하며 앞을 향해 발을 내디딘다. 이쾌대는 이 여자아이를 통해 분명한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오로지 계속해서 앞을 보고 나아가라!

 
이쾌대, ‘군상 4’의 세부. 개인 소장.

명확한 메시지를 지닌 작품이라 해도, 그것을 표현하는 기술이 부족하면 작품은 성공하지 못한다. 이쾌대는 수많은 인물을 서로 혼란스럽게 뒤엉키듯 배치하면서도 모든 동작과 표정을 정확한 해부학적 원리에 기초하여 완벽하게 표현했다. ‘한국의 미켈란젤로’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이쾌대, ‘군상 1-해방고지’, 1948, 개인소장.

◇물방울 화가 김창열과 ‘끈기’ 내기를 한 스승

세로 177cm, 가로 216cm에 달하는 이런 대작을 1945년부터 1950년 사이 해방기에 제작할 수 있었던 화가는 거의 없었다. 다들 이념 갈등에 휩싸여 눈치를 보던 시기였다. 이쾌대는 그런 혼란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늘 꿈꾸던 대작을 그리기 위해 별도의 작업 공간까지 마련했다. 서울 돈암동 458-1번지(현 동소문동 3가)에 천장이 높은 홀을 빌렸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공간을 마련한 김에, 이곳을 후학을 양성하는 연구소로 발전시켰다. 나라가 시끄러워도 청년은 자라는데, 화가를 꿈꾸는 이들이 기초를 배울 기관이 마땅치 않던 때였다.

이쾌대가 운영한 성북회화연구소 실내 사진, 1940년대 후반, 개인소장.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는 그렇게 탄생했다. 1946년 초부터 1950년 초까지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이곳에서 많은 후배 예술가가 길러졌다. 조각가 권진규와 전뢰진, 공예가 황종례가 이 연구소 출신이다. 화가 중 가장 눈에 띄는 이는 ‘물방울 그림’으로 유명한 김창열(1929~2021)이다. 이쾌대와 김창열의 작품은 외견상 전혀 친연성도 없어 보이지만, 김창열은 자신이 화가로 성장하는 데 그의 첫 스승 이쾌대가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고백했다. 생존 시 인터뷰에서 ‘이쾌대에게서 무엇을 배웠느냐’는 질문에 노화가 김창열은 느린 속도로, 눈물을 삼키며,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성실성. 끈기. 누가 움직이지 않고 하루 종일 그림 그리나 내기해. 이렇게 얘기하셨다고.” “감동적이야.”

이쾌대, ‘상황'. 1938, 개인소장. 이쾌대 유학시절 작품으로 수수께끼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쟁 포로 수용소에서도 후학을 가르치다

해방기 혼란은 최악의 시련을 안겼지만, 이쾌대는 그저 앞을 향해 갈 뿐이었다. 그러나 6·25전쟁을 거치면서 그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6·25전쟁 중 우왕좌왕하던 사이 미군에 포로로 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힌 것이다. 처음에는 부산에 수감되었다가, 포로가 너무 많아지자 거제도에 새로운 수용소가 조성되었다. 이쾌대는 추위 속에서 천막을 짓고 포로수용소를 만드는 일부터 동원되었다. 그나마 수용소의 체계가 잡히고, 5시 반에 기상하여 점호, 식사, 작업이 반복되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거제포로수용소 모습. 전쟁 기간 중 최대 14만명이 수용되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이 험악한 곳에서도 이쾌대가 저녁 시간을 쪼개 한 일은 10대의 화가 지망생을 위해 손수 인체 데생 교본을 제작한 것이다. 이주영(1934~2008)이라는 한 소년이 미술에 재능을 보이자 그를 위해 ‘미술 해부학’을 강의하고 기록한 노트이다. 총 40여 쪽에 달하는 이 노트는 인체의 균형과 골격, 근육, 동작의 원리를 친절하게 그림과 함께 설명한 수준급 교본이었다. 포로수용소에서 아무런 참고 자료도 없이 이런 교본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종이도 귀했으니, 뼈와 근육의 이름과 역할, 움직임을 가르친 후, 땅에다 막대로 그려 보게 하면서, 강의와 교재 제작을 이어갔다고 한다. 이주영은 이 교재를 목숨처럼 지키며 포로수용소를 나온 후, 살아있는 동안 공개하지 않았다. 그의 사후 2010년에야 유족이 알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쾌대, ‘미술해부학 노트’ 중 머리 부분 근육에 대한 설명, 1951년 추정,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쾌대, ‘미술해부학 노트’ 중 안면각에 대한 설명, 1951년 추정,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편 이쾌대는 1953년 휴전협정 포로 교환 때 북을 택했다. 유명한 이여성의 동생이었기에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으로 간 이여성이 얼마 안 되어 숙청당한 것처럼, 이쾌대도 북에서 거의 활약하지 못했다. 1965년 자강도 산간 지역 강계에서 병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쾌대, ‘자화상’, 1940년대, 개인소장.

◇“내가 아는 것은 계속해서 가는 것뿐이다”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후학을 가르친 이쾌대의 의지와 열정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자신의 시대는 비록 이만큼밖에 전진하지 못했지만, 다음 세대는 그 바탕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지.

사실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우리는 단지 ‘오늘 우리가 할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도 우리는 이쾌대의 분명한 메시지를 계속해서 듣는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 밴드인 방탄소년단의 노래 가사에도 그 메시지가 나오니까. “All that I know is just going on & on & on & on(내가 아는 것은 단지 계속해서 가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