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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의 문화一流] 어린 시절 세 번 버려졌지만… 아내의 사랑으로 예술혼 불태운 천재 화가

최만섭 2022. 2. 14. 05:06

 

[박종호의 문화一流] 어린 시절 세 번 버려졌지만… 아내의 사랑으로 예술혼 불태운 천재 화가

입력 2022.02.14 03:00
 
 

빈의 벨베데레 궁전에 간 사람들은 클림트의 명화들을 보고 나면, 바삐 떠나려고 한다. 그 옆방에 걸린 강렬한 그림을 유심히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쁜 어머니들’이라는 그림은 설경(雪景)을 그린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나무마다 여자들이 걸려있다. 마치 폭풍에 날아와 나뭇가지에 걸린 빨래들 같다. 긴 머리와 치렁치렁한 의상이 뒤엉킨 모습은 어머니의 소임을 저버려서 자책하고 울부짖는 것만 같다.

그림의 작가는 조반니 세간티니(Giovanni Segantini·1858~1899)다. 그를 검색하면 ‘스위스의 분할파’라든지 ‘알프스의 초상화’가 같은 상투적인 표현뿐이다. 그러나 한 예술가를 어떤 그룹으로 묶는 것은 그의 치열한 인생행로에 대한 모독일 수 있다. 그를 알기 위해서는 알프스 산속으로 가야 한다. 빈에서 기차를 세 번이나 갈아타야 닿는 스위스의 휴양 도시 장크트모리츠(생모리츠)에는 세간티니 박물관이 있다.

세간티니는 이탈리아 북부 아르코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오스트리아 영토였다. 그가 태어날 즈음 그의 형이 불에 타 죽는다.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이후로 아이를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어린 세간티니는 굶주림에 허덕였다. 일곱 살 때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는 아이를 밀라노의 이복 누나에게 맡기고 사라졌다. 하지만 누나도 양육하지 않았다. 호적 신고도 하지 않아, 세간티니는 오스트리아인도 아니고 이탈리아인도 아닌 무국적자가 되었다. 초등학교도 가지 못한 그는 집을 나와 밑바닥을 전전했다. 거리의 부랑아로 떠돌다가 재활원으로 보내졌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누나에 의해 세 번 버려진 것이 어린 시절의 역사였다.

그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지만, 그림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는 밀라노의 명문 브레라 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레슨도 받지 않은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원근도 색채도 모두 새로운 것이었다. 그의 그림은 학교에서 화제가 되었다. 그는 학생들 사이에서 영웅이었지만, 권위적인 교수들은 학생인 그를 경계했다. 하지만 브레라의 브레나치는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았고, 고급 물감 세트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학교에서 그는 밀라노 명문가의 아들인 카를로 부가티를 만났다. 부유하고 세련된 카를로는 세간티니를 고급 식당으로, 갤러리로, 라스칼라 극장으로 데리고 다녔다. 그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다. 세간티니는 카를로를 통해 그의 여동생 루이자를 만났다. 세간티니는 밀라노 최고의 멋쟁이였던 루이자를 비체라고 부르며, 둘은 연인이 되었다. 부가티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다. 조반니가 호적도 국적도 없었기에, 두 사람은 법적으로 부부가 아니었고 세례도 받지 못했다. 당시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는 적대국이었는데, 세간티니는 두 나라에서 모두 병역 기피자였다. 그는 비체와 함께 알프스의 산속 마을로 들어가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둘이 부부가 아니라는 소문에 마을의 교회와 주민들은 그들을 냉대하였고, 그럴수록 둘은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숨어들어 갔다.

 

비체는 조반니의 네 아이를 낳았다. 여섯 식구는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도 함께하였고 비체는 평생 그를 떠나지 않았다. 낮에 세간티니는 알프스의 풍경을 그렸고, 저녁이면 비체는 그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이탈리아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 독어와 영어도 잘했던 비체는 밤마다 세간티니에게 위고와 괴테와 니체를 읽어주었다. 밀레의 전기도 읽어주었다. 세간티니는 밀레를 좋아했다. 그는 밀레가 농촌에서 살았고 농부들을 그렸고 가난했고 밀레 부부도 정식 부부가 아니었다는 점이 좋았다. 세간티니는 예술가로서나 가장으로서 밀레를 따랐지만, 화풍은 모방하지 않았다. 세간티니는 산중의 가난한 농부들을 그렸지만, 실은 그가 가장 가난했다. 그는 비체에게 배운 글로 그녀에게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매년 봄이 오면 알프스에 핀 첫 제비꽃을 당신에게 바칠 것입니다. 당신이 그 꽃을 받지 못하는 봄이 온다면, 그때는 제가 세상을 떠난 겁니다….”

해발 2000m의 겨울 오두막에서 세간티니는 세상의 냉혹함과 자연의 광폭함을 몸으로 버텼다. 그는 스승도 동료도 비평가도 없이, 홀로 자신의 미술 세계를 발전시켰다. 결국 그는 189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이탈리아 국가상을 받았다. 1896년에는 빈 분리파 전시회에 초대되고 분리파 의장인 클림트에게 극찬을 받았다. 그리고 1900년에 열릴 파리 세계박람회에 스위스 대표로 선발되었다. 그는 자신이 살던 엥가딘을 그린 풍경화 세 점을 보내기로 했다. 그것은 ‘삶’ ‘죽음’ ‘자연’ 등 철학적 3부작이었다. 그는 전시를 위해서 무려 12.5m의 벽이 필요하다고 파리 당국에 통고했다. 이제 다가올 20세기와 함께 그는 세상의 주목을 받을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작업하던 어느 저녁, 세간티니는 급성복막염으로 쓰러졌다. 의사도 없는 산속에서 그는 비체의 품에 안겨 4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은 후에야 19세기 가장 위대한 화가의 한 명으로 인정받았고, 스위스 정부는 그가 그토록 필요했던 스위스 국적을 수여하였다. 그가 죽은 후 비체는 그를 뒤따라갈 때까지 35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의 무덤에 꽃을 꽂았다. 세간티니는 처음으로 자신을 버리지 않은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를 그저 풍경화가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삶을 모르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혹독한 자연보다도 더 잔인한 인간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배척당했던 고통스러운 인생의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운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