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데뷔 60년 임권택 “‘이만하면 잘 만들었구나’하는 영화 못 남기고 간다

최만섭 2022. 2. 1. 14:17

 

데뷔 60년 임권택 “‘이만하면 잘 만들었구나’하는 영화 못 남기고 간다”

[그때 그 사람]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 … 총 102편 남겨
“만든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 서로를 응원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장원재 장원재TV대표
입력 2022.02.01 06:30
 
 
 
 

1962년 2월 4일 서울 국도극장(國都劇場). 구정(舊正) 대목을 맞아 새 영화가 걸렸다. 신인 감독의 데뷔작이라고 했다. 제목은 <두만강아 잘 있거라>. 학생 독립단이 서대문 형무소를 파괴하고, 온갖 시련 끝에 만주로 건너가 항전(抗戰)을 계속한다는 이야기다. 사랑, 배신, 오해, 고문을 당해 목숨을 잃는 가족, 필사(必死)의 탈출과 일본군의 산중(山中) 추격전 등을 담은 흑백영화다. 마지막 장면은 전설로 남았다. 설원(雪原)을 배경으로 한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 독립군은 스키를 타고 총을 쏘며 일본군을 압도한다.

임권택 감독./ 사진=조준우

이전의 한국 영화에선 볼 수 없었던 상상력과 스케일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제작자는 최관두(崔貫斗), 관객 수는 6만 9000명이다. 서울 인구가 250만 명으로, 관객이 5만 명을 넘으면 제작자가 돈방석에 앉는다고 하던 시절이다. 2022년 기준이라면 ‘500만 관객동원’ 정도라고 추정할 수 있다. 신인 감독의 이름은 임권택(林權澤‧87). 그래서 2022년 2월 4일은 거장(巨匠)의 감독데뷔 60주년 기념일이다.

◇부산 국제시장에서 군화장사

18살 때 소년 임권택은 집에서 기차 삯만 훔쳐서 가출했다. 휴전(1953년 7월) 전의 이야기다. 돈을 더 들고 나왔더라면 좋았겠지만, 집안에는 훔치고 싶어도 훔칠 것이 없었다.

임권택은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 도착했다. 수중에 돈이 없어 사흘을 굶었다. 길거리에서 자고, 노동판에서 지게를 졌다. 힘이 없으니 일이 서툴고, 일이 서투니 일감도 부족했다. 글자 그대로 춥고 배고파서 술 없이는 잠들지 못하는 나날이었다. 육체노동과 음주의 후과(後果)는 수전증.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 끝에 시작한 일이 군화(軍靴) 장사다. 장사를 한 곳은 국제시장이다.

전쟁통에서도 예술혼은 피어난다. 자유를 갈망하는 기질은 포화(砲火)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법이다. 군화 장사로 돈을 번 사람들 중 일부는 서울로 가서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가 1956년에 개봉한 <장화홍련전>이다. 이 영화를 만들고 있을 때에 인편으로 임권택에게 연락이 왔다. 촬영 현장에서 심부름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이제는 떠돌지 않고 먹고 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화 장사가 거의 망한 지경이었죠. 그래서 바로 상경(上京)했습니다. 연출부가 아니라 제작부로 들어간 거죠. 촬영하는 걸 보기는 했지만, 영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연출부로 옮긴 건 4~5년 뒤죠. 제작부에서도 연출부에서도, 저는 처음부터 영화판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영화 <장화홍련전>에서 유령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배경 그림이 그려진 대형 원통을 돌리고, 귀신의 머리카락을 날리는 선풍기를 돌리는 것이 가출청소년 임권택의 임무였다.

밤낮없이 묵묵하게 그러나 미친 듯이 소임을 다하는 임권택을 당대의 일류 정창화(鄭昌和‧94) 감독이 주목했다. 정창화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연출부에 정식으로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임 감독은 그 시절부터 눈에 띌 정도로 성실했다고 한다. 새벽 4시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만 불리면 바로 사무실로 어김없이 나와서 묵묵히 온갖 허드렛일을 다 했다는 것이다. 정창화 감독이 임권택을 키워 보겠다고 결심하고 연출부로 발탁한 이유다.

“따로 영화 공부를 한 적은 없습니다. 제게는 오로지 정창화 감독님의 촬영장이 교과서이자 학교였죠. 영화 일도 정창화 감독님 아래에서만 배웠어요. 정 감독님은 고지식하시고, 성실하시고, 예술적 고집이 센 분이셨습니다. 정확한 콘티(continuity)를 바탕으로 촬영하셨죠. 콘티만 봐도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

- 감독데뷔는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그때는 예비 감독들에게 영화적 재능이 있는지 부족한지를 가늠할 길이 없었어요. 한번 만들어보라고 하는 것이 재능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죠. 그래서 처음 감독 제안을 받았을 때 여러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감격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작품으로 내 영화 인생이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제 소원이 평생 열 작품만 하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월간조선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3주 동안 흥행했는데, 위에서 언급한 스키 장면에선 관객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 ‘독립군이 스키를 타는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면서도 즐거워했다. 말이 난 김에 덧붙이자면, 영화 속에서 스키를 타며 독립군으로 ‘출연’한 배우들은 모두 원주 제1야전군사령부 스키부대의 현역 장병들이었다. 그래서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것이다.

‘걸어다니는 영화백과사전’으로 불리는 정종화 선생은 이 영화를 두고 “2008년 660만을 동원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으로 이어지는 ‘한국산 만주 서부극’의 단초가 <두만강아 잘 있거라>에 들어 있는 셈”이라고 평가한다.

◇“작품만 보고 배우 골라”

임권택의 주량은 소주 2병 정도지만, 거의 매일 약주를 즐긴 애주가(愛酒家)다. 단, 예외는 있다. 일에 들어가면 절대 금주(禁酒)다.

“그건 제 양심(良心)에 관한 문제죠. 40~50명의 스태프가 감독 하나만 보고 대기 중인데, 감독이 술을 먹고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말이 안 되니까요.”

 

작업에 관한 원칙이라면 하나 더 있다. 캐스팅에 관한 한, 누구의 부탁도 들어주지 않는다. 부인 채령 여사의 증언이다.

“감독님은 작품만 보고 배우를 고르죠. 박노식 선생이 유일하게 감독님과 호형호제(呼兄呼弟)하던 배우인데 아들 박준규 씨가 TV프로그램에 나와서 그러더군요. ‘아빠 찬스를 쓴 적이 있냐?’는 질문에 ‘없다. 임권택 감독님이 저를 한 번도 쓰지 않으신 것이 증거다’라고요.”

임권택 감독이 덧붙인다.

“캐스팅을 잘못하면 감독도 망하고 배우 본인도 망하고 영화사도 망합니다. 여러 사람에게 다 폐를 끼치는 일이에요.”

◇가장 아끼는 작품은 <서편제>

1993년 이청준이 발표한 소설 <남도사람>을 영화화한 <서편제>는 한국 영화사에 기념비적 작품이다.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한 작품인 동시에, 영화 한 편이 영화를 넘어서 사회 현상으로 승화(昇華)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국민적 성원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조심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했죠. 내 영화가 이렇게 많은 관객과 만난다면, 그러니까 국민의 정신적‧정서적 건강에 어떻게 기여하느냐 하는 문제로 보면, 제가 어떤 영화를 만드느냐에 따라 영화가 위험한 매체가 될 수도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내가 제일이 아니다’라고 수시로 다짐했습니다. 인기(人氣)와 명성(名聲)에 놀아나고 자기를 놓치면 곤란하다고 되뇌었어요.”

소설가 이청준(1939~2008)과는 이웃사촌이었다. 용인의 한 아파트에 우연히 함께 입주, 수시로 서로의 집을 오가며 영화와 문학을 논했다. 영혼의 동반자라면 두 사람이 더 있다. 제작자 이태원(李泰元‧1938~2021)과 촬영감독 정일성(鄭一成‧93)이다.

“두 분은 제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함께 한 사람이죠. 두 분이 없었다면 제 영화 인생도 다르게 흘러갔을 겁니다. 영화 인생을 살면서 참 좋은 분들과 만났었구나, 내 인생이 폐만 끼치는 인생이었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 가장 아끼는 작품은 무엇일까요?

“<서편제>입니다. <춘향뎐>(2000)도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 좋은 감독은 어떤 감독입니까?

“죽어라고 뛰어다니는 감독, 준비를 철저히 하는 감독이죠. 그 가운데서도 헌팅이 중요합니다. 헌팅을 소홀히 하면 영화를 못 만들어요.”

이문열(李文烈)의 단편 <익명(匿名)의 섬>을 영화화한 <안개마을>(1983)에 나오는 몽환적(夢幻的) 분위기는 충청북도 단양, <서편제>의 수채화(水彩畵) 같은 풍경은 전라남도 섬마을을 수없이 밟고 답사한 흔적이다.

임권택 감독과 부인 채령 여사./ 사진=조준우

◇허장강‧김지미‧안철수

- 임권택에게 영화란 무엇입니까?

“저는 영화가 좋아서 평생을 더불어 살았을 뿐입니다. 저는 영화를 만드는 모든 과정이 재미있었어요.”

- 배우들에게는 무엇을 주문하시는지요?

“원하는 감정이 우러나도록 배우에게 여러 소리를 다했죠. 그걸 못 끌어내면 영화 일을 그만둬야 합니다.”

- 기억에 남는 배우는 누구입니까?

“제 영화에 출연한 모든 배우들이 저한테는 다 좋은 인연이고 소중한 분들입니다. 그래도 한 사람을 꼽으라면…. 허장강(1925~1975)은 독특한 배우였어요. 감정을 극대화 시켜서 드러내는데, 자연스럽지 않지만 명확하게 느낌을 잡아냈거든요. 딱 그 상황에 걸맞는 연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했던 배우입니다.”

말이 난 김에 몇몇 배우들에 대한 평(評)을 더 듣고 싶었다. 필자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배우들에 대해 질문했다.

“김지미는 좋은 의미에서 독종이고, 안성기는 성실한 사람이죠. 강수연은 허술한 점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배우입니다.”

가장 감사한 일은 위험한 촬영이 많았는데도 단 한 번도 사고(事故)가 없었다는 점이다. 1960년대, 70년대, 80년대는 안전의식이나 장비가 지금과는 달랐던 시절이다. 실제로 영화를 찍다 유명(幽明)을 달리한 영화인도 여럿이다.

“촬영 중에 제가 실탄을 쏘기도 했으니까요. TNT 폭약을 미리 묻는 과정에서 실수로 터진 적이 몇 번 있지만, 다행히 촬영 중에는 한 번도 사고가 없었습니다. 그 점이 두고두고 감사합니다.”

◇“내 인생은 내가 좋아서 산 것”

임권택의 필모그라피는 총 102편. 101번째 작품이 <달빛 길어 올리기>(2010), 102번째 영화가 <화장>(2014)이다.

“더는 작품을 하기 힘들겠죠. 무엇보다도 체력과 건강이 예전 같지 않으니까요. 제 모든 작품은 습작(習作)입니다. 저는 평생을 영화를 하며 살았지만, 어디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작품은 만들지 못했어요. 영화감독으로서 이만하면 잘 만들었구나, 그런 영화를 못 남기고 갑니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으셨습니까?

“삶을 진솔하게 들여다보는 영화, ‘열심히 살아줘서 고맙다’고, 만든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 서로를 응원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내 인생은 내가 좋아서 산 것이니, ‘그런 인생을 살아간 선배가 있었구나’, 그렇게 기억해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 더 자세한 내용은 《월간조선》 2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