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명화 돋보기] "평화가 승리한다면, 내가 그린 전쟁은 과거 이야기 될 것"

최만섭 2022. 3. 14. 05:24

 


[명화 돋보기] "평화가 승리한다면, 내가 그린 전쟁은 과거 이야기 될 것"

입력 : 2022.03.14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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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戰 메시지 전한 화가들

①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1814년). ②케테 콜비츠, ‘전쟁-미망인’(1922년). ③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1937년). /프라도국립미술관·뉴욕현대미술관·레이나소피아미술관
 ①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1814년). ②케테 콜비츠, ‘전쟁-미망인’(1922년). ③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1937년). /프라도국립미술관·뉴욕현대미술관·레이나소피아미술관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反戰)' 목소리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전 세계로 퍼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남산타워와 서울시청 등 건물 외벽도 우크라이나 국기를 암시하는 노랑과 파랑 조명으로 환하게 밝혀졌죠. 평화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겁니다.

전쟁은 오랫동안 미술 작품 주제로 다뤄졌습니다. 승리의 기쁨을 표현한 작품도 있지만, 국가 간 다툼과 폭력이 사라지기를 기원하는 작품도 있죠. 붓과 캔버스로 전쟁의 잔혹함을 고발하고 전쟁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의 비탄을 드러냄으로써 반전 메시지와 함께 평화에 대한 염원을 기록한 명작을 살펴볼까요?

나폴레옹 군대의 민간인 처형 고발

〈작품1〉은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가 그린 '1808년 5월 3일'이란 작품입니다.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 민간인들을 처형하는 장면이지요. 이 그림에서 고야는 스페인을 침략한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에 대한 강한 분노를 표현하고 있어요.

화면 왼쪽에 흰옷을 입고 양손을 위로 든 남자는 깜깜한 하늘과 대조적으로 마치 무대 위 집중 조명을 받은 것처럼 환합니다. 이날 일어난 처형은 그 전날 스페인 국민들이 무력으로 저항하며 프랑스 병사들을 학살한 것에 대한 프랑스의 보복이었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1808년 5월 3일'인데, 고야는 바로 전날 스페인 국민의 저항을 그린 '1808년 5월 2일'이라는 작품도 남겼답니다.

프랑스의 스페인 점령기(1808~1814)에 고야는 전쟁의 잔혹함을 여러 스케치로 남겼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작품들을 모아 1863년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가 '전쟁의 참상'이라 불리는 판화집을 발행했어요. 이 책에서 고야는 나폴레옹뿐 아니라 의미 없는 희생자를 만들어내는 전쟁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목판화로 거칠고 삭막한 느낌 표현

20세기 초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한 케테 콜비츠(1867~1945) 역시 1923년에 전쟁을 주제로 한 7점의 판화 작품집을 출판했는데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여성의 관점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품2〉는 그중 하나인 '미망인'입니다. 슬픔에 빠진 여인이 고개를 숙인 채 몸을 웅크리고 있어요. 거친 손은 힘든 삶을 암시하는데, 부풀어 오른 배 위에 올려둔 두 손은 그가 아이를 가졌고 홀로 남겨져 앞으로 힘겹게 살아가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콜비츠는 전쟁의 잔혹함을 삭막하고 절박한 이미지로 표현하고자 부드럽고 세련된 선으로 그림을 그리는 대신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느낌을 주는 목판화를 택했어요. 화사한 색채도 쓰지 않고 오직 검은색 하나로만 가족의 죽음을 직접 겪은 이들의 고통을 엄숙하게 나타냈습니다.

콜비츠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아들 한 명을 잃었어요. 이후 태어난 손자에게 죽은 아들의 이름을 붙여줬지만 그 손자마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숨지고 말았지요. 전쟁으로 아들과 손자를 잃은 상실감,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래선지 콜비츠는 죽음에 대한 작품을 다수 남겼습니다. 그녀는 안타깝게도 2차 대전 종전을 몇 달 앞둔 시점 생을 마쳤어요.

내전 참상 고발한 피카소

콜비츠와 비슷한 시기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스페인의 미술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북부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 쏟아진 포탄에 격분하여 '게르니카'를 그렸습니다(〈작품3〉). 후에 스페인의 총통이 되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은 스페인 내전 기간 자신의 세력에 반대했던 게르니카 마을을 독일과 이탈리아의 비행기 폭격 실험장으로 내줬어요. 그러면서 공습의 효과를 연구해보도록 했습니다. 3시간 동안의 폭격으로 시민 1000여 명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갔지요.

이 그림 역시 콜비츠의 작품처럼 흑백입니다. 크기는 가로 7.7m, 세로 3.5m에 달해요. 피카소는 신문에 실린 흑백으로 된 폭격 사진을 본 후 작품을 구상했다고 해요. 화면 중앙 부분에 저항하는 말이 그려져 있는데, 그 말의 몸통에 털처럼 그려놓은 작은 줄표가 보입니다. 언뜻 인쇄된 글자로 빽빽한 신문 지면을 떠올리게 하지요.

맨 오른쪽에는 한 여자가 불타는 건물에서 탈출하려는 듯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있고, 왼쪽에는 죽은 아이를 안은 어머니가 울부짖고 있어요. 보도사진에서 영감을 받은 이 그림은 실제로 보도사진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피카소는 1937년 프랑스 파리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에 이 그림을 전시했고, 그림은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전쟁의 상처 구현한 땅속 기념비

20세기 후반에 벌어진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을 추모하는 기념비 작품도 있어요.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전사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전쟁에 대한 논란이 잦아들기를 염원하며 미국 워싱턴DC에 기념비를 세우기로 했습니다. 기념비 디자인은 공개 모집으로 뽑았는데, 1400건 이상의 경쟁을 뚫고 당시 스물한 살의 대학생 마야 린의 작품이 당선됐지요.

린은 기념비를 땅 위에 자랑스럽게 우뚝 세우는 대신, 땅속으로 파고들도록 구상했습니다. 전쟁은 그 어떤 이유로도 영광스러운 일이 될 수 없고, 모두에게 푹 파인 깊은 상처만 남겨놓는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상처의 치유를 기원하며, 린은 V 자 모양의 벽이 어두운 땅속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빛의 세상 위로 올라오는 형태를 제시했습니다. 죽은 이들의 이름은 군대 계급이 아니라 사망 날짜에 따라 벽에 새겨졌어요. 벽의 표면에 광택을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 반사되도록 만들었어요. 검은색 돌 위에 새겨진 이름들에 자신을 비춰보며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지금 우리가 살아있음을 감사히 여기자는 뜻이랍니다.

[피카소와 게르니카]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1937년 프랑스 파리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에 전시됐어요. 스페인의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화가 호안 미로(1893~1983)도 이 전시회에 2층 높이의 벽화를 걸었어요. 낫을 들고 밀을 수확하는 농부를 그린 '추수하는 사람(The Reaper)'입니다. 추수하는 사람을 스페인어로는 'segador'라고 하는데, '낫을 들고 싸우는 민병'이라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고향인 카탈루냐 민중이 프랑코에게 항거해 싸우는 모습을 담았어요. 피카소는 당시 게르니카 전시 준비를 마치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 세계에서 평화가 승리하게 된다면, 내가 그린 전쟁은 과거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유일한 피는 뛰어난 그림, 아름다운 회화 앞에서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 전시회 이후 게르니카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세계 곳곳 전시회에서 얻은 수익은 스페인 내전의 구호 기금으로 쓰이게 됐답니다.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