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글자 하나 없는 그림책’… 세계 어린이책 새역사 썼다

최만섭 2022. 3. 23. 05:22

‘글자 하나 없는 그림책’… 세계 어린이책 새역사 썼다

‘아동문학 노벨상’ 안데르센상, 한국인 최초로 수상한 이수지
“보는 과정 전체가 놀이인 책” 評
이미지의 힘으로만 이야기 풀어내… 글 붙여오라며 출판사서 퇴짜도
“난 입 ‘떡’ 벌리고 얼어붙었는데 남편은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죠”

입력 2022.03.23 03:01
 
 
 
 
 
이것 보세요, 엄마. 파도가 선물을 줬어요!” 왼쪽 위 비죽 튀어나온 우산 아래 엄마를 향해, 바닷가에서 뛰어놀다 파도에 흠뻑 젖은 아이는 손에 쥔 소라 껍데기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미국서 먼저 출간돼 ‘글 없는 그림책’ 작가 이수지의 이름을 널리 알린 책 ‘파도야 놀자’는 책의 쪽 사이 경계를 활용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며 성장하는 아이의 마음을 표현한다. /비룡소

“휴대전화로 시상식 온라인 중계를 틀어놓고 있었거든요. 밤 11시가 넘었는데 ‘안데르센상 이수지!’ 하는 거예요. 저는 놀라서 입 떡 벌리고 얼어붙었는데, 남편이 정말 좋아하면서 소리 지르며 펄쩍펄쩍 뛰더라고요. 그제야 제 방에서 딴짓 하던 아이들이 무슨 일인가 빼꼼히 내다보고….”

22일 아침 서울 광장동 작업실에서 마주 앉은 이수지 작가는 웃으며 수상 발표 순간을 떠올렸다. 작가는 21일(현지 시각) 이탈리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개막 기자회견에서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가 주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이하 안데르센상)의 올해 그림 작가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제 책들이 전형적인 주류 그림책들과 다른 점이 많아서, 주목받고 상을 받을 때마다 매번 놀라워요. 놀라운 만큼 감사하는 마음도 배로 커집니다.”

21일(현지시각) 이탈리아 볼로냐 도서전 개막 기자회견에서 이수지 작가가 올해 안데르센상 수상자로 발표되는 순간. /국제아동청소년문학협회(IBBY) 유튜브 캡처

안데르센상은 ‘아동문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세계 최고 권위의 상. 1956년 제정돼 격년제로 수여된다. 우리 작가 수상은 처음이며, 아시아 작가 수상도 1984년 일본 작가가 받은 뒤 38년 만이다. 한국은 수상자를 낸 세계 28번째 나라가 됐다. 안데르센상 한국 심사위원 이지원 평론가는 “작가의 작품 세계가 역사적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가 크다. 그림책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가 일군 놀라운 성취”라며 “한 명의 독자로서도 행복한 날”이라고 기뻐했다.

안데르센상 수상자 명단에는 그림책의 역사를 만들어온 거인들의 이름이 가득하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모리스 센댁, ‘찰리와 초콜릿 공장’(로알드 달)의 그림 작가 퀀틴 블레이크, ‘돼지책’과 ‘윌리’ 시리즈의 앤서니 브라운, 소설가 에리히 케스트너와 ‘삐삐 롱스타킹’의 창조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등이 이 상을 받았다.<역대 수상자 대표작> 올해엔 33국 위원회가 자국에서 연구하고 평가한 62명의 후보를 추천해 다국적 심사위원 10명의 엄격한 심사를 받았다. 그림책 ‘국가 대항전’인 셈이다.

역대 안데르센상 수상자 대표작

IBBY는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에 대해 “가장 정제된 스타일로 가장 진지한 이야기를 전하는 신나는 놀이”라고 했고, 작가에 대해서는 “그림을 통해 생명을 얻는 이야기 바구니를 놓고 독자들과 함께 노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또 “이수지 작가의 글 없는 그림책은 독창적인 문학적·미학적 혁신으로 널리 인정받아왔다”며 영국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소장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경계 3부작’으로 불리는 ‘거울’ ‘그림자 놀이’ ‘파도야 놀자’ 등의 작품을 언급했다. IBBY 한국위원회는 이수지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글 없는 그림책’ 작업에 관해 덧붙였다. “아이의 현실과 환상 세계를 책이라는 매체의 물성(物性)을 토대로 꾸준히 탐구하며 ‘글 없는 그림책’의 시각 언어 가능성을 실험해왔다. 주로 여자 아이를 등장시켜 세계를 탐험하는 주체로서 여성을 표현하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올해 안데르센상 수상자 이수지 작가의 '경계 3부작' 중 '그림자 놀이'. /비룡소

작가는 “사실 작품 활동 시작 즈음엔 출판사에 글 없는 그림책을 가져가면 불편해하면서 글을 붙여오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웃었다. “더듬더듬 계속 길을 찾아가다 보니, 어느 순간 ‘글 없는 그림책’ 만의 고유한 자리가 생겨나더군요. 신기했어요. 그림책의 역사에서도 가장 혁신적이고 눈에 띄는 실험들은 ‘글 없는 그림책’을 통해 이뤄졌죠. 제 책들에 독창적이라고 할 만한 부분이 있다면 역시 그 점 같아요. 원래 있는 글을 뺀 게 아니라, 오로지 이미지의 힘과 시각적 서사로 할 수 있는 이야기.”

22일 아침 서울 광장동 작업실에서 만난 이수지 작가가 올해 라가치상 수상작인 '여름이 온다'의 원화를 펼쳐 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오른쪽 머리 위의 갈매기는 미국에서 먼저 출간돼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책 '파도야 놀자'의 갈매기. 작가는 '아동문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안데르센상의 올해 그림작가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태훈 기자

작가의 그림책은 단순히 종이에 새겨진 그림을 넘어서, “어린이가 펼치고 덮고 가지고 노는 놀이의 과정 전체가 전개된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림 자체의 아름다움이 빼어나, 그림책을 귀여운 캐릭터 중심 동화책의 하위 장르로 여기는 선입견에서도 멀찍이 벗어나 있다. 김지은 평론가는 “이수지 작가는 그림책의 역사에서 ‘글 없는 그림책’이라는 분야를 재조명하고, 그 아름다움과 가능성을 새로 발견해 재등장시켰다”며 “책의 가능성이 후퇴한다고 말하는 시대, 책이 얼마나 미래의 매체일 수 있는지 보여주고 그 가능성을 넓힌 사람”이라고 했다.

안데르센상은 글 작가와 그림 작가 두 부문이 있으며, 올해 글 작가 부문상은 프랑스의 마리-오드 뮈라이가 수상한다. 시상식은 9월 5일부터 말레이시아 푸트라자야에서 개막하는 제38차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 국제총회에서 열린다. 상금은 없으며, 덴마크 여왕 메달이 수여된다.

☞작가 이수지는…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

―영국 캠버웰 예술대에서 ‘북 아트’ 석사

―볼로냐 라가치상 2회(2021·22)

―뉴욕타임스 최고 어린이 그림책상(2008, 2010)

―한국 출판문화상(2019)

―작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에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