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신화로 읽는 세상]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鐘이리니

최만섭 2017. 8. 1. 06:47

[신화로 읽는 세상]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鐘이리니

  •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입력 : 2017.08.01 03:13

아기의 목숨 삼킨 에밀레종… 잔인한 얘기만은 아냐
우린 저마다 상실로 고통받지만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면
그 상실이 참된 나를 찾게 하는 나를 위해 울리는 종소리였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켈트족이 예식을 올렸던 신성한 땅에 성모 마리아를 기리며 노트르담 성당이 세워졌다. 노트르담의 종지기 콰지모도는 흉측한 몰골로 아름다운 영혼을 지키며 운명 같은 사랑의 실타래를 풀었다. 콰지모도가 귀먹어가며 귀가 열리는 소리를 만들어낼 때 존 단은 이렇게 썼다.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종이리니.'

파리에 콰지모도의 종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에밀레종이 있다. 당신은 당신을 돌려세우는 종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위기 상황에서 엄마를 부르는 아이의 비명처럼 간절하면서도, 간절함을 넘어 장엄해진 에밀레 종소리를. 에밀레종, 너무나 유명한 종이다. 아기를 잡아먹고서 비로소 맑은 소리를 냈다는 그 종. 원래의 이름은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인데, 공식적인 이름은 그저 표지판에 붙여만 두고, 바람이 전하는 대로 다들 '에밀레종'이라 부른다.

신라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며 만든 종은 12만근이나 되는 구리를 쓰고도 제대로 소리를 만들지 못했다. 무엇 때문일까? 스님들은 보시하기로 한 아기를 거절한 데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종을 만들기 위해 탁발에 나선 스님은 한 가난한 집에 들렀다. 그런데 보시할 재물이 없었던 여인이 "이 아기라도" 했던 것이다. 그것이 여인의 진심이었을까, 농담이었을까. 어쨌든 스님은 화들짝 놀라 아기를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그 집을 나왔다. 그런데 종이 소리를 내지 않자 상황이 달라졌다. 종이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바로 보시를 거절한 데 있었다고 본 것이다.

탁발은 구걸이 아니다. 보시를 받는 탁발은 그 자체 보시행이다. 그것은 부처와 그 제자들이 하루 일곱 집을 돌며 많이 주든, 적게 주든, 인색하게 주든, 기분 좋게 주든, 안 주든, 못 주든 좋아하지 않고 욕하지 않고 주면 주는 대로 안 주면 안 주는 대로 그대로 받는 데서 유래한다. 그대로 받아 그대로 올려 그대로 생명을 돌보는 데 쓰는 것, 그것이 탁발의 정신이다.

[신화로 읽는 세상]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鐘이리니
/이철원 기자
화주 스님은 그 엄마의 집을 찾아 기어이 아이를 받아냈다. 아기는 종을 만드는 끓는 쇳물 속으로 들어갔다. 아이를 삼킨 쇳물은 비로소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종을 만들어냈다. 엄마의 보물인 아기를 삼키고, 엄마의 비명을 삼키고, 그러고 나서 종은 깊고 오묘한 일승(一乘)의 원음(圓音),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소리를 내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어른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산목숨을 끓는 쇳물 속에 던져 넣을 수 있을까? 그 얘기를 들려주던 할아버지는 아기를 보시하기로 한 엄마의 말이 잘못이라고 했다. 농담으로도 함부로 약속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은 때때로 자기조차 잊은 말의 빚을 받으러 온다고. 그래도 끔찍함은 해소되지도, 지워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내 마음 밭에 떨어진 그 이야기가 어떤 시절을 거치며 싹을 내고 꽃을 피웠다.

에밀레종을 영혼의 종으로 만드는 것은 엄마의 생명인 아기다. 그 엄마에게 아기는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이다. 그대에게 그대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소중한 무엇이 있는가? 바로 그것을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것을 놓지 못해 에밀레, 에밀레 우는 내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헛손질만 하는 시간, 삶이 다 끝난 것 같은 그 상실의 끝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그저 털썩 주저앉아 비명 같은 눈물을 쏟아낸 적이 있는지. 소중한 것을 제물로 내줘야 하는 '나'의 비명에 스스로 놀라지도 않고, 남에게 호소하거나 떠벌리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그리고 가만히, 자기 비명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미워서, 억울해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올라올 때 그 마음을 그대로 둔 채 마음을 돌이켜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무엇인가 묻다 보면 내 소중한 아기를 삼키며 쇳물 끓듯 끓던 마음이 차분해진다. 장중한 소리는 거기서 올라온다.

소리의 감동은 결코 구리나 철근의 양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나'를 그치게 하는 소리, '나'를 돌이키게 하는 소리는 내가 사랑하고 매달리는 것, 없으면 안 된다고 집착하고 있었던 것, 집착인 줄도 몰랐던 그것을 제물 삼아 일어난다. 고통의 파고가 일어나 내 마음을 찢고 나를 파괴하고 있을 때, 드
라마를 보듯 남의 이야기를 듣듯 거리를 두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고통의 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나'는, 경험 너머에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그 무언가에 도달하는 길 위에 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그 잃은 것이 '나'에게 이르는 제물이었음을 고백하게 될 때 일승의 원음, 진리의 둥근 소리, 에밀레 종소리가 들린다. 그대를 위해 울리는 종소리가.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31/201707310273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