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김정운의 麗水漫漫] 교양 없거나, 이번 생은 틀렸거나…

최만섭 2017. 8. 2. 06:44

[김정운의 麗水漫漫] 교양 없거나, 이번 생은 틀렸거나…

  •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

입력 : 2017.08.02 03:12

소셜 미디어에 나쁜 이야기만 올리는 이들과 '친구 맺기' 싫지만
그런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은 위험에 경각심 갖는 인간 본성 탓
괴담과 음모론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교양 쌓고 예술 체험 늘려야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
습관적으로 '나쁜 이야기'만 소셜미디어로 보내는 이들이 있다. 그들과 '친구'를 맺으면 아주 고통스럽다. 밤새 '나쁜 이야기'만 쌓여 있기 때문이다. 죄다 남 조롱하고 비아냥대는 이야기뿐이다. 희한하게 '사회정의'로 정당화하며 즐거워한다. '나쁜 이야기'에 서로 '좋아요'를 죽어라 눌러댄다. 각자의 소셜미디어에 쌓이는 '나쁜 이야기'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모여 앉아도 남 욕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러고 사는 걸까?

타인의 관심을 얻기에 '나쁜 이야기'가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원시시대를 한번 생각해보자. '저기 바나나가 있다'는 정보와 '저기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정보 중에 내가 지금 살아남는 것과 관련해 어느 이야기가 더 중요할까? 당연히 '저기 호랑이가 있다'는 '나쁜 이야기'다. 바나나는 내일 먹어도 된다. 그러나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무시하면 바로 잡아먹힌다. '나쁜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보다 생존에 훨씬 더 중요했다. 원래 인간은 남 망하거나 인생 꼬인 이야기, 남 흉보는 것과 같은 '나쁜 이야기'에 귀가 솔깃하도록 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나쁜 이야기'에 매번 귀가 솔깃한 이유는 바로 이 원시적 본능이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잠시만 한눈팔아도 목숨이 날아가던 원시시대 이야기다. 문명화된 사회란 날것의 위험들을 제어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갖춰진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도 사방에 '나쁜 이야기'들뿐이다.

'나쁜 이야기'에 끌릴 수밖에 없는 타인의 반응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불안한 인간이 너무나 많은 까닭이다. 불안한 이들이 불안을 유포해 혼자만 불안하지 않으려는 아주 웃기는 현상이다.

인간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유한한 존재의 운명인 불안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다. '나름 화가'라고 주장하지만, 캔버스 앞에 앉으면 매번 무엇을 그려야 할지 막막하다. 화풍이 이틀마다 바뀌는 초짜 화가의 심각한 문제다. 그래서 인류 최초의 화가들은 도대체 무엇을 그렸는지 찾아봤다. 죄다 소를 그렸다.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그린 화가나 프랑스 리스코 동굴벽화의 화가도 자신들이 잡아먹은 소의 신령들에게 바치는 그림을 그렸다. 살아 있는 것을 잡아먹고 나니, 자신도 잡아먹힐까 두려웠던 것이다. 독일의 문화철학자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은 이를 가리켜 그림의 '제의가치(祭儀價値·Kultwert)'라고 개념화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림의 '전시가치(展示價値·Ausstellungswert)'는 한참 이후에 생겨났다.

'나쁜 이야기'에 끌리게 되어 있다!
'나쁜 이야기'에 끌리게 되어 있다! /그림 김정운
소 그림만이 아니다. 추상화도 인간의 원초적 공포와 불안을 극복하려고 그렸다. 문화심리학자 빌헬름 보링거(Wilhelm Worringer)의 주장이다. 보링거에 따르면 이집트 피라미드에 남겨진 온갖 문양이야말로 추상화의 진정한 기원이다. 예측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자연의 위협 앞에서 인간은 추상적 기호들의 법칙성으로 맞섰던 것이다. 단순한 선과 형태를 규칙적 문양으로 표현하려는 '추상적 충동(Abstraktionsdrang)'이야말로 '감정이입 충동(Einfülungsdrang)'과 더불어 예술을 가능케 한 인간의 근본적 욕구라는 것이 보링거 예술심리학의 핵심이다. 한마디로 불안과 공포야말로 인간 문화와 예술의 기원이 된다는 이야기다.

무한한 시간과 공간의 공포도 문화의 힘으로 극복되었다. '시간은 반복되는 것'으로 여김으로써 통제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올해 망했다면, 내년에 잘하면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번 생은 틀렸다며 다음 생을 기대하기도 한다. 인류의 온갖 축제는 이렇게 반복되는 시간을 즐거워하는 일이다. 무한한 공간의 공포도 좌표를 만들어 극복했다. 해 뜨는 '오리엔트(orient)', 즉 동쪽을 기준으로 하면 무한한 공간이 정리되는 '오리엔테이션(orientation)'이 일어난다. 정원을 만들고, 사원을 짓고, 탑을 세우는 것과 같은 공간 정리의 '건축한다(bilden)'는 행위와 문화적 소양을 갖춘다는 '교양(Bildung)'의 독일어 어원은 같다. 교양이 있어야 혼란스럽지 않고, 불안하지 않게 된다는 거다.

불안한 사회일수록 다양한 문화적 경험과 예술적 체험이 탈출구다. 스마트폰의 허접한 음모론이나 들여다보고, 근거 희박한 설명으로 흥분만 하는 각종 평론가의 시사프로그램 채널이나 만지작거리는 방식으로 존재의 불안은 절대 해소되지 않는다.(참으로 궁금한 것이 '평론가'들의 실체다. 채널을 바꿔도 매번 똑같은 얼굴이다.)

공연히 불안하면 미술관, 박물관을 찾아야 편안해진다. 그곳은 불안을 극복한 인류의 '이야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가' 하는 느닷없는 질문으로
조급해진다면 음악회를 찾는 게 좋다. 몸으로 느껴지는 음악은 삶의 시간을 여유롭게 만들어준다.

문화와 예술의 존재 이유에 관한 이토록 어려운 이론을 이렇게 쉽게 설명했는데도 여전히 '허걱!', '세상에나!'로 시작하는 스마트폰 문자에 자꾸 손이 가거나, '집단 불안' 마케팅이 반복되는 TV 리모컨을 집어든다면, 당신은 교양이 없거나….

이번 생은 틀린 거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01/201708010327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