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21세기 햄릿, 태아의 '입'을 통해 고뇌하다

최만섭 2017. 8. 1. 09:39

21세기 햄릿, 태아의 '입'을 통해 고뇌하다

입력 : 2017.08.01 03:02

[한국어판 '넛셸' 출간한 이언 매큐언 인터뷰]

맨부커상 받은 영국 대표 작가… 셰익스피어 '햄릿' 패러디한 소설
자궁 속 胎兒를 話者로 삼아 북핵 위기 등 시대 문제 풍자

당대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이언 매큐언(69)이 최근 장편 소설 '넛셸(Nutshell)' 한국어판 출간을 맞아 본지와 인터뷰를 가졌다. 매큐언은 맨부커상을 비롯해 주요 문학상을 휩쓸었고, 그의 소설 '어톤먼트'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의 소설 대부분은 국내에도 번역돼 우리에게도 낯익다.

지난 3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소설‘넛셸’의 이탈리아어 번역본 출판 행사에 참석한 이언 매큐언.
지난 3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소설‘넛셸’의 이탈리아어 번역본 출판 행사에 참석한 이언 매큐언. /Getty images 코리아
작가는 런던에서 차로 두 시간 반 거리의 산골 마을 스트라우드에 살았다.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들판과 산길을 한참 달려도 차 한 대 만나지 못했다. 내비게이션이 가르쳐 준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에 집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방금 지나친 갈림길에서 다른 길로 접어들어야 한다고 했다. 런던에 살던 그는 5년 전 시골이 좋아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고 했다.

'넛셸'은 셰익스피어 '햄릿'을 패러디한 소설이다. "아아, 나는 호두 껍데기 속에 갇혀서도 나 자신을 무한한 왕국의 왕으로 여길 수 있네-악몽만 꾸지 않는다면"이란 햄릿의 대사에서 착상됐다. '넛셸'은 호두 껍데기 속을 자궁으로 바꾸고, 그 안에서 발육 중인 태아를 화자(話者)로 삼았다. 태아는 어머니가 듣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유럽 연합 위기부터 북핵 미사일 위기까지 세상 일을 훤히 꿰고 있다. 태아의 입을 통해 우리 시대의 문제를 풍자적으로 다룬 것이다.

―'넛셸'은 '나는 여기, 한 여자의 몸속에 거꾸로 들어 있다'로 시작한다. 햄릿의 한 구절을 패러디한 것인데, 이 소설과 햄릿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나.

"햄릿은 현대성의 모든 측면을 가졌다. 햄릿은 선과 악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세상에 대해 온갖 의문을 가졌다. 이런 의문이 그를 선명하게 현대적 존재로 만들었다. 햄릿은 창조된 인물 중에 가장 지적이고 현명한 존재 중 한 명이다. 내 작품 속 주인공인 '말하는 태아'는 햄릿의 메아리를 갖고 있다. 그건 또 한편으론 셰익스피어의 메아리이기도 하다. 배속 태아로 하여금 세상을 논하게 하고, 세상을 향해 발언하도록 하는 것은 햄릿 같은 인물에게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 태아는 과거도 없고, 종교도 없고, 친구도 없다. 그는 다만 어둠 속 목소리일 뿐이다."

―배속에서 세상의 모든 일을 듣는 태아가 현재 인류가 당면한 수많은 어려움과 과제를 꿰뚫고 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인류는 핵전쟁을 겪지 않을 수 있을까. 세상을 봐라. 미국과 중국, 러시아뿐만이 아니다. 인도와 파키스탄, 심지어는 세상에서 가장 제정신이 아닌 북한도 핵무기를 갖고 있다. 10년, 20년 전 나는 21세기가 핵전쟁 없이 지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다. 혹자는 기후변화와 테러리즘을 얘기하기도 하지만, 냉전 시기에 우리의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핵 문제가 훨씬 복잡한 형태로 재등장했다. 인간의 실수와 어리석음이 서로를 향해 핵무기를 쏘는 일로 이어질 수 있다. 세상에 대해 생각을 하는 이성적인 태아에게 이는 큰 근심거리다."

―인류에게 필요한 지혜는 어떤 것인가. 또 그걸 어떻게 얻을 수 있나.

"해답은 없다. 다만, 다른 사람이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호기심과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지혜를 얻는 출발점이 아닐까. 인간은 결점투성이지만 사랑과 독창성이란 잠재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동물이다."

―인류의 미래에 대해 낙관론자인가, 비관론자인가.

"나는 나 자신을 낙관론 쪽으로 가까이 가게 하려 한다. 젊었을 때는 비관론을 사랑했다. 비관론은 참 맛있었다고나 할까. 그건 마치 연회 같았다. 지성인은 비관론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인생 경험의 축적은 사람을 바꿔놓는다. 성장하고, 아이를 낳아 돌보고, 그들이 커 가는 것을 보면서 말이다. 오랜 지병을 앓던 친구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거나 그
들이 용기를 갖게 되는 걸 보면서도 그렇다. 이런 모든 것이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위협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 같다. 나는 낙관주의를 굳건히 믿으려 한다. 하지만 우리가 꼭 배워야 할 것들이 있다. 무엇보다 정의와 부를 어떻게 평등하게 분배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아주 어려운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깨지기 쉬운 낙관론'을 갖고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31/201707310276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