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7.29 03:10
米壽의 노학자 부부가 써서 보내온 공동 文集 펼치니
정인보 이희승 김성칠 등 師表 삼을 이들의 사연 가득
이 어지러운 세상에 귀감 될 言行一致 삶에 그리움 일어
![김태익 논설위원](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707/28/2017072802658_0.jpg)
그제 출근하니 책 한 권이 배달돼 있었다. '사모문집'이라고 한글로 쓰인 책 안에는 하얀 종이에 정갈하게 만년필로 쓴 편지가 들어 있다. "부끄러운 책 보내드립니다. 하두 어지러운 세상이니 혼자 조용히 보십시오." 보낸 분은 국어학자 강신항(姜信沆) 성균관대 명예교수다. 그와 부인 정양완(鄭良婉) 전(前)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과거에 썼던 글을 모은 책이었다. 두 분은 올해 미수(米壽·88세)다. 서울대 국문과 최초의 과(科) 커플로 연을 맺어 60년 넘게 해로(偕老)했다. 반가운 마음에 책을 읽다가 혼자만 볼 수는 없겠다 생각했다.
부부에게 국어학자 일석 이희승 선생은 우뚝한 학자이자 삶의 사표이기도 했다. 일석은 입버릇처럼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분수에 넘치는 생활을 안 한다. 공짜로 재물을 탐하지 않는다." 일석은 일흔 넘어까지 만원 버스를 타고 다녔다. 부인 상(喪) 때 일체의 조화와 부의금을 사절했다. 그러다 만년에 재산을 후학들의 국어학 연구를 위한 장학금으로 희사했다. 일석은 6·25 발발 직후 서울에 남았다가 '잔류파'로 몰려 수모를 겪은 후 1·4후퇴 때는 부산까지 걸어서 가는 결기를 보였다. 그는 "인생은 길게 보면 결과는 마찬가지야"라며 후배들에게 소리(小利)를 탐해 자주 직장 옮기는 것을 경계했다고 한다.
김원규 선생은 1946년 강 교수가 서울고 1회로 입학했을 때 교장이었다. 당시 서울고는 학생들이 자진해서 새벽 청소와 야간 숙직이라는 걸 했다. 교장이 직접 새벽에 나와 학교 먼지를 털고 다니니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느 자리에 있든지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돼라." 김 교장은 조회 시간에 나라와 인생을 주제로 훈화하다가 격해지면 우는 일도 많았다. 그러면 학생들도 고개를 떨구고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교장이 지각생을 잡으려 뛰다가 일어난 '실족절골(失足切骨) 사건'은 당시 서울고의 유명한 일화였다. 김 교장은 공부 잘하는 사람을 대접하고 부정과 게으름을 증오했다. 독선(獨善)과 독존(獨尊)으로 비칠 수 있었지만 학생들은 교장의 진심을 이해했다.
'역사 앞에서' 저자 김성칠 교수는 6·25 때 강 교수와 전사편찬실에서 함께 근무했다. 그는 강 교수에게 홍명희 소설 '임꺽정'을 권하며 "우리말 어휘 공부는 이보다 좋은 교재가 없소"라고 했다. 그가 67년 전 어느 날 점심을 사주며 한 얘기를 강 교수는 지금도 새기고 있었다. "돈암동 전차 종점에서 미아리 고개까지 뻗은 줄의 끝에 가 서더라도 기다리면 언젠가는 전차를 타게 될 것이오. 급하다고 새치기하거나 남을 밀칠 필요가 없소. 꾸준히 실력을 기르면 차례가 올 것이오."
정양완 교수는 아버지인 위당 정인보 선생 얘기를 썼다. 정 교수가 어렸을 때 아버지 앞에서 투정을 부렸다. "저는 슬퍼요. 다른 애들처럼 예쁘길 해요, 노래 잘하고 춤 잘 추기를 해요." 그러자 위당이 말했다. "나는 왜 햇빛이나 달빛처럼 남들을 골고루 사랑하지 못할까, 그게 슬프단다. 내 어머니와 이웃 할머니가 물에 빠졌다고 하자. 나는 우선 내 어머니 구하기에 정신없을 것이다. 이웃 할머니는 결국 못 살릴지 모른다. 왜 사람의 사랑은 달빛이나 햇빛 같지 못할까. 이 애비는 그게 슬프단다." 위당은 "자신을 심판할 땐 매섭게, 남을 책망할 땐 너그럽게 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책을 덮자 마음이 훈훈해졌다. 그리움 같은 것이 일었다. 이 밖에 방종현 이숭녕 남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