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Why] 젊은 날 실연의 고통, 어느덧 달콤한 그리움으로 남았네

최만섭 2017. 7. 22. 09:08

[Why] 젊은 날 실연의 고통, 어느덧 달콤한 그리움으로 남았네

  • 이주엽 작사가

입력 : 2017.07.22 03:02

[이주엽의 이 노래를 듣다가]

/조선일보 DB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최백호 '낭만에 대하여' 중

'궂은 비 내리는 날'이니, 비는 을씨년스럽게 추적추적 오겠다. 우산을 접고 들어선 '옛날식 다방' 풍경은 어떠한가. 해진 소파와 낡은 탁자들을 끼고 여러 무리 사내들이 수다로 시끄럽고, 습기와 담배 연기가 어지럽게 섞여 퀴퀴할 것이다. 탁자에 오른 '도라지 위스키'는 위스키향이 나는 싸구려 독주이므로, 시쳇말로 키치적이다. 저렴하게 우아한 고급을 흉내 내고자 했던 시대의 욕망이 슬프게 배어 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짙은 색소폰 소리'다. 도라지 위스키의 키치적 욕망에, 좀 있어 보이는 색소폰 연주가 얹혀야 제격이다. 취한 사내들의 눈빛은, 인생의 과장된 비애를 씹어가며 밤늦도록 흔들렸으리라. 취흥이 한껏 올랐을 때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누군가 수작을 건다. 저 '실없는 농담' 사이로 생의 한쪽이 가볍게 출렁였을 때 우린 젊었고, 추억의 변두리로 밀려간 저 풍경이 문득 눈물겹게 그리울 때 우린 이미 늙은 것이다.

최백호가 직접 만들고 노래한 메가 히트곡 '낭만에 대하여'가 불러내는 낭만은 해사하지 않고, 삶의 눅눅하고 후미진 곳에 소재하고 있다. 대체로 시적 성취는 '낮은 응시'에서 온다. 최백호의 낭만도 그런 시적 태도에 닿아 있다. 노래하는 그의 목소리는 기품 넘치면서도 삶의 슬픔을 생래적으로 터득한 사람의 페이소스로 가득하다.

이 노래는 멋진 '어른의 노래'다. 이어지는 다음 한 줄이 이를 확증한다.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실연의 절벽 위에 섰던 고통의 시간조차 달콤한 그리움으로 느낄 때가 온다. 불안하고 막막해도 몸이 뜨겁다는 것만으로 청춘은 축복이었다, 라고 생각할 때 뜨거운 몸을 잃은 늙은 삶은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하여 삶은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설렐 것도 없는 시간의 변방으로 밀려간다. 그러므로 '달콤함'이라는 단어가 품은 삶의 그늘은 깊고 넓다.

노래는 항구의 노스탤지어로 우릴 이끈다. 항구는 인연이 끝없이 들고 나는 곳이다. 만나고 떠나고 기다린다. 멀리 뱃고동 소리가 울려오지만 '돌아올 사람은 없다'. 그 '슬픈 뱃고동 소리'에 실려, 세월의 무상함을 한 줄로 압축한 또 다른 절창이 날아든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꿈같이 설레던 첫사랑 신생의 시간과, 삶의 비밀을 다 알아버린 지금의 퇴락한 시간을 한 문장 안에 병치하며, 삶의 비애와 연민을 탁월하게 그려낸다.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낸 뛰어난 싱어송라이터 최백호의 글쓰기가 간단치 않음을 보여준다.

노래의 또 하나 매력은 엔딩이다. 이 노래의 종지부는 '대하여'다. 가사로는 흔치 않게 종결형 서술 구조가 아니라 생략형의 열린 구조로 끝난다. 뜻이 매듭지어지지 않고 청자들의 마음속으로 확장된다. 낭만의 여운은 그래서 길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언제부턴가 좋은 '어른의 노래'가 사라졌다. 그동안 성인 가요는 '타락'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미학적 퇴행을 거듭해왔다. 교태 섞인 '꺾기' 창법을 노래 잘한다는 기준으로 정하고, 서민 음악이라는 이유로 저급한 가사 경쟁을 해왔다. 그 결과 품위와 서정이 넘치던 전통 음
악의 맥이 끊어지고, 낯뜨거운 행사용 음악이 득세했다. '낭만에 대하여'는 성인 음악이 기품을 갖추면서도 얼마든지 대중성을 얻을 수 있다는 반성적 계기를 만들었다.

시간의 여행자들이 지닌 여비는 연민이다. 어디선가 나처럼 늙어가는 첫사랑을 만난다면, 복거일의 시처럼 '먼발치에서 지켜볼 일'이다. 그 애틋한 마음의 길을 따라 우리는 또 하릴없이 늙어갈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21/201707210155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