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개혁

[송희영 칼럼] 위기의 씨앗 제거하지 않는 정치

최만섭 2015. 12. 5. 10:04
  • [송희영 칼럼] 위기의 씨앗 제거하지 않는 정치
  • 송희영 주필

입력 : 2015.12.05 03:20

9·11 후 무차별적 금리 인하로 '세계 금융 쇼크 초래' 비난받은 美
파리 테러 후 IS戰 선포한 유럽도 금리 낮추고 돈 풀어 버블 가능성
정부·국회, 위험 요소 미리 제거해 유럽發 경제 위기 대비해야

송희영 주필 사진
송희영 주필
미국이 공격받던 2001년 9·11 테러 때 연방준비제도(FRB) 그린스펀 의장은 스위스발 귀국 비행기 안에 있었다. 그는 기장에게 사태를 전해듣고 캐나다에 내려달라고 요청했으나 결국 취리히로 되돌아가야 했다. 다음날 아침 그린스펀은 백악관에 연락해 공군의 공중 급유기를 특별 배정받아 귀국했다.

회고록에서 그는 '2차 공격은 피할 수 없다. 핵 공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썼다. 그런 위기감은 FRB가 엿새 만에 금리를 0.5% 인하하는 결정을 불러왔다. 곧이어 2주 만에 다시 0.5%, 다음 달 또 0.5% 인하하는 식으로 여섯 번 인하를 연속 단행했다. 미국 경기는 몇 달 만에 회생했다. 놀라운 회복력이었다.

"시장이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유연한 경제 환경을 갖추고 있으면 테러 같은 충격도 흡수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는 뿌듯한 자부심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7년 뒤 2008년 무차별적인 금융 완화 정책은 세계 금융 쇼크를 낳은 '악(惡)의 씨앗'이었다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4일 금리를 내렸다. 은행들이 ECB에 여유 자금을 맡길 때 부과하는 벌금성 수수료를 올렸다. 마이너스 금리가 더 깊어진 것이다. 파리 테러 3주 만에 나온 결정이다.

유럽은 9·11 이후의 미국을 뒤따르고 있다.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전쟁을 선포했다. 영국·미국·독일이 프랑스와 연대 전선을 펼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공격했던 것과 같은 패턴이다.

전쟁은 비싼 정치 게임이다. 중앙은행은 돈을 풀고 정부는 국방비 지출을 늘린다. 전쟁이 끝나도 한번 뿌려진 돈은 부동산·주식시장에서 버블을 만든다. 그 버블은 반드시 폭발해 옆 나라, 그 옆 나라로 나쁜 불똥을 퍼뜨린다는 것을 9·11 이후 미국이 보여주었다. 이번에 유럽산(産) '버블의 씨앗'이 뿌려지면서 한국에도 서서히 불행의 씨앗이 날아들 것이라고 봐야 한다.

21세기 들어 세계경제는 크게 변했다. 경제 블록이 갈수록 거대한 규모로 형성되고 있다. 유로 동맹이 대표적이고, 최근 미국·일본 주도의 환태평양자유무역권(TPP)이 등장했다. 중국은 인프라투자동맹(AIIB)을 만들었다. 우리가 개별 국가들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만하다.

무엇보다 우리는 달러화, 유로화, 엔화가 뭉텅이로 살포되는 신세계에 살고 있다. 이런 발권(發�) 경쟁 때문에 경제 위기는 분노 조절 장애 환자처럼 언제 폭발할지 모를 재앙이 됐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를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먼저 암덩어리를 서둘러 제거하는 대응법을 꼽을 수 있다. 수술을 미루면 반드시 위기 때 2차 폭발, 3차 폭발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우리 가계 부채는 1200조원에 접근했고 비정규직 근로자는 627만명을 넘었다. 정부와 국회는 노동·금융을 비롯해 공공 부문 등 수술이 급한 곳을 웬만큼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런 위기의 환부를 도려내지 않고 있다.

위기에 대한 또 다른 대응 방법은 신속한 의사 결정이다. 사전 예방에 실패할 경우 사후에라도 민첩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대처 방식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여당은 국민이 매번 다수당을 만들어 주었는데도 다수의 의결권을 포기했다. 야당은 그 틈새를 이용해 매번 정부·여당의 발목을 잡아끌거나 넘어뜨리고 있다.

국회는 FTA를 통과시키면서 아무 근거 없이 기업들에 1조원을 바가지 씌웠다. 이 법을 인질 삼아 저 법을 통과시키고 예산을 볼모로 다른 법을 고치는 뒷거래도 횡행했다. 19대 국회는 막장 풍경이라 할 만한 장면을 여럿 실연(實演)했다.

유럽은 금리를 내린 반면 미국은 곧 금리를 올린다. 많은 국가가 가라앉거나 제자리걸음 하는 가운데 미국 홀로 달러화의 위력을 과시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9·11 이후 세계경제의 황태자로 부상했던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共)는 뒷전으로 밀리고 그 자리를 채울 '샛별 국가군(群)'은 떠오르지 않고 있다.

지금은 세계경제의 권력 판도가 변형되고 조정되는 시기이다. 어느 나라에서 비명이 먼저 터질지 알 수 없다. '이번엔 당신 차례'라고 지목받는 국가들 리스트도 나오고 있다. 우리는 1차 요주의 국가 명단에선 빠져 있다. 그러나 한번 크게 출렁이면 "또 한국이냐"는 조롱의 대상이 될 가능성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사전 예방 조치를 하지 않고 있는 데다 사후 의사 결정도 매번 늦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금리 인하나 돈 풀기, 세금 조정으로 살아날 경제가 아니 다. 공공 분야부터 노동시장, 금융산업을 근본적으로 수술해야 하는 병(病)에 걸린 나라다. 이대로 가면 엄청난 피를 흘린 뒤에나 위기 극복한다고 법석을 떨 수밖에 없다.

그린스펀은 훗날 쓰라린 역풍(逆風)을 맞았지만 위기 때 신속한 행동으로 경제를 살려냈다. 우리 정치권에 그런 발 빠른 결단으로 위기의 씨앗들을 제거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역시 헛된 꿈이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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