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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쟁이가 甲이 되는 날

최만섭 2015. 10. 14. 09:49

빚쟁이가 甲이 되는 날

김신영 경제부 기자 사진
김신영 경제부 기자

한국을 찾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머튼 교수가 한 강연에서 질문을 던졌다. "모든 빚이 지닌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문득 떠오른 답을 중얼거렸다. "갚아야 한다?" 머튼 교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빚의 공통점은 하나, 빌린 사람이 안 갚으면 빌려준 사람이 돈을 떼인다는 겁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빚졌다고 꼭 갚는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빚쟁이로 제정 로마 시대를 연 카이사르가 꼽힌다. 그의 빚은 군인 11만명을 고용할 수 있는 3100만세스테르티(로마의 화폐 단위)에 달했다. 역사학자들은 카이사르가 그토록 많은 돈을 빌릴 수 있었던 비결로 '대출자의 저주'를 꼽는다. 일단 한번 대출해준 사람은 카이사르가 혹시라도 파산할까 봐 돈을 자꾸 더 빌려줄 수밖에 없는 선순환(혹은 악순환)이 반복됐다는 것이다. 가장 많은 돈을 빌려줬던 당대의 갑부 크라수스는 다른 이들에게 대출 좀 더 해주라고 카이사르를 위해 '영업'까지 뛰었다. 돈 빌린 사람이 망하면 빌려준 이도 함께 망한다는 명제는 지금도 유효하다.

미국 속담엔 이런 말이 있다. '수천달러를 빌리면 은행이 당신을 소유하지만, 수천만달러를 빌리면 당신이 은행을 소유한다.' 돈 몇만원을 돌려받지 못해 마음 졸였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돈 빌려주고 '을(乙)' 노릇 하는 기분이 얼마나 씁쓸한지 알 것이다. 개인 사이 푼돈 거래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그리스에 돈을 빌려준 유럽 국가들이 '빚 깎아주라. 아니면 안 갚는 수가 있다'고 버티는 그리스에 끌려 다니느라 세계경제가 휘청했던 일이 불과 몇 개월 전이다. 분수에 맞지 않는 주택 담보대출을 받고 이자가 오르자 '못 갚겠소'라고 일제히 자빠졌던 미국의 채무자들은 세계를 할퀸 2000년대 말 글로벌 금융 위기의 기폭제가 됐다.

한국은 부채(負債)라는 영역에서 이전에 가보지 않은 길에 들어섰다. 빚은 매월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증가 속도도 무섭다. 시가총액 상위 10개 회사를 두 번씩 사들이고도 남을 돈을 개인들이 빚으로 지고 있다. 기업 부채는 더 심각하다. 사업해서 이자도 못 갚는 이른바 '좀비 기업'이 상장 회사의 3분의 1이다. '을' 신세가 된 은행들이 그동안 빌려준 돈을 떼일까 봐 망해가는 회사에 돈을 반복해서 빌려준 결과다.

달러라는 강력한 '총알'을 보유한 미국은 돈을 무지막지하게 찍어서 금융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런 '강대국의 해법'을 엄두도 못 내는 한국은 빚 폭탄이 터질 때면 세금을 투입해 채무 구조조정, 시쳇말로 빚잔치를 벌여 왔다.

'단군 이래 최대'로 불어난 거대한 한국의 빚 덩어리가 어디로 향할지는 아직 모른다. 빚 갚기를 포기한 채무자들이 은행을 무너뜨리고 국가 경제의 발목을 잡은 그리스식(式) '빚의 악몽'이 한국에서 재현되는 최악은 피해야 한다. 성장률 3%도 버거워진 기운 빠진 한국 경제는 이전처럼 빚잔치를 감당할 수 없다. 지난 국정감사에서 경제 관료들이 "아직은 괜찮다"며 부린 여유는 그래서 더 위험해 보인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