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안준용이 만난 사람] “복지 제도 가짓수는 세계 최고인데 수요자 아닌 공급자 중심 설계가 문제… 복잡한 전달 체계 확 바꿔야… 연금개혁·저출산 대책도 시급

최만섭 2022. 8. 29. 05:13

[안준용이 만난 사람] “복지 제도 가짓수는 세계 최고인데 수요자 아닌 공급자 중심 설계가 문제… 복잡한 전달 체계 확 바꿔야… 연금개혁·저출산 대책도 시급

초대 복지부장관 지낸 서상목 한국사회복지협의회장

입력 2022.08.29 03:00 | 수정 2022.08.29 03:00
 
 
 
 
 
초대 보건복지부 장관인 서상목 한국사회복지협의회장은 지난 25일 서울 마포구 집무실에서 가진 본지 인터뷰에서“복지 전달체계의 구조조정·효율화, 국민연금 개혁, 저출산 대처가 윤석열 정부의 3대 복지 과제”라며“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으면서 정치력과 행정력을 동시에 갖춘 인물을 복지부 장관으로 앉혀야 한다”고 했다. /고운호 기자

보건복지부(옛 보건사회부)가 출범한 1994년 우리나라 보건·복지 예산 규모는 3조3700억원. 전체 예산(43조2500억원)의 8% 수준이었다. 올해 보건·복지·고용 예산 규모는 총 216조원이다. 전체 예산(604조원)의 36%에 달한다. 이제 복지는 정권의 우선 과제이자, 국민이 가장 큰 목소리로 정부의 역할을 요구하는 영역이 됐다.

문제는 복지 예산의 규모가 커졌지만 난제(難題)는 쌓여가고 있다는 점이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부터 최근 ‘수원 세 모녀 사건’까지 생활고에 극단적 선택을 하는 ‘복지 사각지대’의 비극은 되풀이되고 있다. 2055~2057년이면 고갈된다는 전망이 나오는 국민연금은 ‘연금 개혁’을 공약으로 내세운 문재인 정권도 손을 대지 못한 채 5년을 허송세월했다.

초대 보건복지부 장관이자 1980년대 KDI(한국개발연구원) 부원장으로 국민연금 제도 설계를 주도했던 서상목(75) 한국사회복지협의회 회장은 지난 25일 본지 인터뷰에서 “복지의 전체 규모를 키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복지를 필요로 하는 국민에게 얼마나 효율적으로 잘 전달하느냐의 문제이고, 그것을 잘하는 게 바로 복지 개혁”이라고 했다. 한국사회복지협의회는 사회복지 사업과 관련해 정부와 민간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관련 연구, 소외 계층 발굴 등을 맡고 있는 공익 법인이다.

그는 “광범위해진 복지 사각지대를 찾는 일은 정부와 민간이 함께해야 하고, 국민연금 개혁은 정부 출범 초기인 지금이 ‘골든타임’인 만큼 국회보다 정부에서 더 적극적으로 속도를 내야 한다”고 했다.

핀란드·덴마크 등은 원스톱 혜택

-’수원 세 모녀 사건’으로 복지 사각지대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비슷한 비극이 되풀이되고 있다.

“수백 개에 달하는 우리나라 복지 제도는 가짓수로는 세계 최고다. 그런데 혜택을 받는 ‘수요자’ 중심이 아니라 혜택을 주는 ‘공급자’ 중심으로 설계돼있다. 공급자가 편리한 전달 체계로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원금 하나 신청하려면 주민센터, 보건소, 국민연금공단, 건강보험공단 등 제도마다 찾아가야 할 데가 다 다르다. 수급 조건도 까다로워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복지 체감도가 낮다. 각종 복지 제도의 수급 자격 기준 종류만 100여 개라고 한다. 2019년 탈북 모자 사건 때는 탈북 여성이 이혼확인서를 못 내 기초생활수급을 포기했다. 복지 제도와 전달 통로가 너무 많고 복잡해서 그 사이에 사각지대가 계속 생기는 구조다.”

-수원 세 모녀의 경우, 실거주하던 지자체(수원시)에 전입신고가 안 돼 있어 놓쳤다고 한다. 위기 가구 발굴 시스템이 작동 못 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전국에 3만명 정도 되는 사회복지 전담 공무원으로 ‘어려운 사람’을 다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특히 우리 공무원들은 재량권이 없는 데다 방대한 정보를 모아놓은 전산 시스템을 갖고 위기 가구 발굴보다는 부정 수급 적발에 초점을 두는 행정을 한다. 핀란드·덴마크·호주 같은 ‘디지털 복지(e-welfare)’ 선진국들은 한곳에서 국민 개인이 받을 수 있는 맞춤형 복지 혜택을 원스톱으로 찾아준다. 수요자 중심으로 복지 제도와 복지 전달 체계를 통합·개편해나가는 것이 시급하다.”

-복지 시스템 전반을 수요자 중심으로 바꾸기 전엔 복지 사각지대 문제를 개선하기 어렵다는 것인가.

“당장 복지 사각지대 문제를 최소화하려면 행정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민간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 ‘지역 복지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사회복지협의회가 2012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좋은 이웃들’ 사업이 대표 사례다. 평범한 지역 주민, 고시원·PC방 주인, 택배 배달원 같은 이들이 자원봉사자로 지역 내에서 복지 혜택을 제대로 못 받고 소외된 계층을 찾는다. 관(官)이 못 하는 일을 민(民)이 보완하는 것이다.”

수원 세 모녀가 숨진 채 발견된 경기 수원시 권선구 다세대주택에서 지난 23일 사망자 유품 등을 정리하는 특수청소부가 집 안을 살펴보고 있다. /남강호 기자

평범한 이웃이 23만 소외 계층 찾아내

-코로나 사태 이후 사회관계망 단절 등으로 지역 복지 공동체 사업도 쉽지 않은 상황 아닌가.

“현재 전국 117개 시·군·구에서 총 5만9000여 명이 ‘좋은ㅑ 이웃들’로 활동하고 있다. 1곳당 평균 506명의 자원봉사자가 늘 어려운 이웃을 염두에 두고 모니터링하는 셈이다. 이들이 지난 10년간 복지 소외 계층 총 23만7000여 명을 찾아 관공서와 연결해주거나 민간의 지원을 받도록 도왔다. 공용 화장실·폐가에서 연명하는 사람 등 정부의 위기 가구 발굴 시스템으로는 찾기 어려운 이가 상당수다. 8년 전 세 모녀가 목숨을 끊은 송파도, 이번에 사건이 난 수원도 ‘좋은 이웃들’ 사업이 운영되지 않는 곳인데,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업을 전국으로 확장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 임기 동안 복지 관련 예산이 80조원 이상 늘었고, 현금성 복지 규모만 100조원을 넘어섰다.

 
15 초 후 SKIP

“복지의 규모를 키우는 것은 맞는 방향이다. 건강보험도 보장성을 강화하는 방향 자체는 맞는다. 문제는 문재인 정부 때 중앙정부와 지자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복지 정책을 제대로 거르지 못했다는 점이다. 수많은 복지 사업을 심사·평가하고 정리하는 국무총리 직속 기구인 사회보장위원회 등이 역할을 못 했다. 그 결과 지난 5년간 지자체장 등이 선거용으로 남발한 복지 정책이 너무 많아졌다. 비슷한 복지 사업이 중복되고, 예산은 예산대로 나가게 됐다.”

연금 개혁, 정권 초기에 서둘러야

-윤석열 정부의 가장 큰 복지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복잡하고 방대한 복지 정책·전달 체계 구조 조정’과 함께 ‘국민연금 개혁’ ‘저출산 대처’가 현 정부의 3대 과제다. 특히 국민연금 개혁은 정부 출범 초기인 지금 더 빨리 서둘러야 한다. 2024년 총선을 목전에 두고 내년 하반기에 개혁안을 국회로 넘기고 사회적 논의를 맡기면 연금 개혁은 또 표류할 수 있다. 국민연금과 다른 직역 연금 간 통합 등 ‘구조 개혁’ 논의도 국회 연금개혁 특위가 중심이 되도록 하겠다고 했는데, 사실상 안 하겠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고 국회에 개혁안을 넘길 때도 충분히 설득을 한 상태에서 넘겨야 개혁이 가능해진다.”

-추구해야 할 개혁의 방향은 무엇인가.

“핵심은 보험료를 올리는 것이다. 건강보험과 달리 국민연금은 보험료를 내도 혜택을 20~30년 뒤에 받으니 사람들이 세금으로 본다. 그래서 처음 국민연금 제도를 시작하기 어려워 1988년 도입 당시 아이디어를 냈던 것이 보험료율을 3%로 시작해 5년 뒤 6%, 10년 뒤 9%로 올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15~18%까지 올라가야 할 보험료율이 정치권의 눈치보기 때문에 1998년 이후 9%에서 멈춰버렸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생애 평균 소득 대비 연금 급여 비율)이 40%대인데, 혜택을 줄이면 연금의 기능을 상실하는 만큼 소득대체율을 낮춰선 안 되고 보험료율을 올려야 한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보험료율을 올리지 못하고 개혁안을 접지 않았나.

“국민연금은 전체 평균 소득 기준으로 지급되는 ‘균등 부분’과 가입자의 보험료에 연동되는 ‘비례 부분’이 50대50이다. 보험료율을 올리기 전에 이것부터 100% 비례로 바꿔야 한다. 기초연금이라는 제도가 있으니 국민연금에선 균등 부분을 없애고 보험료를 많이 낸 사람이 많이 받는 ‘소득 비례 구조’로 바꿔야 보험료율 인상에 대한 국민 저항을 줄일 수 있다. 다행히 아직은 기금이 900조원 쌓여있는 만큼 당장 보험료율을 2배씩 올릴 필요 없이 인상 스케줄에 합의만 하면 된다.”

국민연금 개혁, 최소 20년 걸릴 것

-개혁 스케줄에 소요되는 시간은 어느 정도로 보는지.

“장기적으로 보험료율을 올리고 기초 직역 연금과 통합까지 하려면 20년은 걸린다고 본다. 통합하더라도 공무원·군인·사학연금의 경우엔 퇴직연금을 별도로 분리하고 내용도 조금씩 다르게 설계해야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3대 복지 과제로 꼽은 저출산의 해법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국민연금 개혁은 답이 정해져 있지만, 저출산은 아예 발상을 바꿔야 한다. 올해 2분기 합계출산율이 0.75명까지 떨어졌다. 매년 OECD 꼴찌다. 2020년 기준 프랑스·미국·영국·독일 모두 1.5명이 넘고, 일본도 1.33명이다. 우선 정부 차원에서 이민 정책으로 외국인 가사도우미 등을 적극 유치해 보육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 출산 장려금과 양육비 지원도 더욱 늘리고, 미혼모·미혼부를 획기적으로 지원해 인공임신중절 건수도 낮춰야 한다.”

-복지부 현안이 쌓여있는데 장관 공석 상태가 110일이 넘었다.

“비상식적이다. 코로나·보건 분야는 질병청·식약처에 맡기면 되지만, 시급한 복지 현안은 하루빨리 장관이 컨트롤해야 한다. 3대 개혁 과제를 추진해나갈 수 있는 장관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개혁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으면서도 정치력과 행정력을 갖춘 인물이 장관으로 와야 한다. 3대 과제 모두 힘 있는 장관이 아니면 손도 대지 못할 시대적 과제들이다.”

 

서상목

미국 스탠퍼드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세계은행을 거쳐 1978~1988년 한국개발연구원(KDI) 부원장 등을 지내며 국민연금 제도를 설계했다. 1988년 정계에 입문해 13~15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1994~1995년 초대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다. 1997년 대선 때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측근으로 활동했으며 2000년 정계 은퇴 후 주로 학계에 몸담았다. 2017년부터 한국사회복지협의회 회장(연임)을 맡고 있다.

 
 
2009~ 사회부, 2013~2014 도쿄 주재, 2015~2017 경제부, 2018~2021 정치부, 2021~2022 경영기획부, 2022~ 사회정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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