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팔순의 깨달음… 노년에도 이성 친구 필요하다”

최만섭 2022. 4. 26. 05:17

“팔순의 깨달음… 노년에도 이성 친구 필요하다”

배우 이호재 무대 인생 60년 기념작 ‘질투’ 내달 27일 개막

입력 2022.04.26 03:00
 
 
 
 
 
배우 이호재는 대학로 근처 원룸에 혼자 산다. 지난 60년 동안 겪은 연출가들에 대해 묻자 “배우는 실험도구가 아니다”라며 “각 배우의 장단점을 미리 파악해 짧고 굵게 연습하면서도 장점을 뽑아내는 연출가가 최고”라고 했다. /이태경 기자

연극판에는 ‘전무송의 긴장, 이호재의 이완’이라는 말이 있다. 전무송은 느리지만 등장하면 관객을 사로잡을 만큼 빛이 나고, 이호재는 빠른 이해력과 유려한 연기로 관객에게 다가간다는 뜻이다. “전무송은 선천적 배우, 이호재는 후천적 배우”(연출가 임영웅)로도 구분된다. 이호재는 이해랑연극상을 가장 먼저 수상(1994년)할 정도로 대학로를 지배한 배우였다.

그 이호재(81)가 연기 인생 60년 기념 무대에 오른다. 5월 27일 대학로 학전블루에서 개막하는 연극 ‘질투’(연출 최용훈). 이혼하고 친구(남명렬)와 화분 사업을 준비 중인 완규(이호재)에게 동네 약사 수정(남기애)이 “단둘이 여행 가자”고 제안하면서 펼쳐지는 황혼 로맨스다. 이호재는 “휘문고 후배이자 ‘불 좀 꺼주세요’의 극작가 이만희가 쓴 신작”이라며 “옛날엔 60까지 살기도 어려웠는데, 술자리나 어정대는 사람이 어떻게 무대에서 60년을 버텼는지, 나도 참 신기하다”고 했다.

–60년을 맞은 감회는.

“연극은 덧없이 사라지고 배우에게 남는 건 없다. 혼자 하는 예술도 아니다. 60년이라니 그저 ‘잘 어우러져 살았구나’ 싶다.”

–한달음에 읽힐 만큼 희곡이 재미있다.

“이만희 작품은 재치가 번뜩이지만 그게 흠이다. 연극이 더 재미있어야 하는데 걱정이다(웃음).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은 좋다. 무엇보다 노인에게 이성(異性)의 말 상대가 있어야 한다는 설정에 공감한다.”

–삼각관계에다 화분 이름도 ‘섹시 그레이’다.

“나이를 먹어도 이성이 그립다. 젊은이들처럼 길바닥에서 끌어안고 펄떡거리는 사랑이 아니다. 내 마음을 꺼낼 수 있고 그이 마음을 들을 수 있는 말벗이, 푸근한 교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나이 들어봐라. 질투는 더 강해진다.”

이호재 무대 인생 60년을 기념하는 연극 '질투'. 권해효, 이대연, 송도순과 연출가 박정희 등이 카메오로 출연한다. /극단 컬티즌

–왜 그럴까.

“(탁자에 놓인 박카스병을 가리키며) 어릴 땐 기(氣)가 이 밑에 있다. 그래서 바지를 벗겨도 괜찮다. 20~30대엔 그것이 허리께로 올라오고 그다음부턴 하체가 약해진다. 노인은 기가 병뚜껑으로 간다. 머리로는 질투가, 입으로는 말이 많아진다.”

 

매우 성공한 배우인데 누구를 질투해본 적이 있나.

“앞에 ‘매우’는 빼라. 연기나 배역에 대한 질투는 아니지만 나도 가지지 못한 게 있었다. 국립극단 시절 (전)무송이 분장실 앞에는 예쁜 여자들이 꽃다발 들고 줄을 서 있었다. 나한테는 털이 시커먼 놈들이 몰려와서 외쳤다. 막걸리나 한잔합시다!”

–팬클럽 이름도 ‘빨간 소주’다.

“술을 마시면 평소보다 자신감이 생긴다. 연기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술자리에서 후배에게 ‘자식아, 왜 그 장면을 그렇게 연기했어?’라고 잔소리가 나오는 게 문제다. 하하. 요즘에는 입을 조심한다.”

2010년 연극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만난 배우 이호재(오른쪽)와 전무송. 드라마센터 동기다. /이진한 기자

–1963년에 데뷔해 평생 연기만 했다. 사는 목적이 뭔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면 그것만큼 추운 게 없다. 세상일은 대부분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럼 그 오슬오슬함을 어떻게 견디나. 연극만 하며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싶었는데 이호재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1980년대부터 방송과 영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맡은 배역과 관객이 어느 호흡까진 같이 가게 하자’는 지향점만 두고 살아왔다.

–이 연극에서 완규의 성격을 상징하는 낱말은 ‘노빠꾸’다.

“나도 빠꾸(후진)를 못한다. 밀고 나가면 그만이지, 돌아선다고 잘 되는 일이 없다.”

배우는 좋은 역할을 맡았을 때 행복을 느낀다. 이호재는 “나와 맞지 않는 배역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허당”이라며 “‘이호재가 해서 그 연극 살았다’는 말이 최고의 찬사였다”고 했다. “대장장이든 뭐든 한 가지 일을 10년 하면 철학이 생긴다는 말이 있다. 순 거짓말이다. 나는 그게 없고 60년이 금방 지나갔다.”

연극 '질투'에 출연하는 배우 이호재 /이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