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명화 돋보기] 原色에 대담한 붓질… '야수파' 화풍에 고향 풍경 녹여냈죠

최만섭 2022. 4. 25. 05:12

신문은 선생님

[명화 돋보기] 原色에 대담한 붓질… '야수파' 화풍에 고향 풍경 녹여냈죠

입력 : 2022.04.25 03:30

윤중식 화백

 ①윤중식,‘ 전쟁 드로잉’(1951년) ②윤중식, ‘전망’(1976년) ③윤중식, ‘석양’(2004년) ④윤중식, ‘무제’(1986년) ⑤윤중식 작가의 옛 모습이에요. /성북구립미술관
"그때는 경치 좋은 대동강변에서 사생(寫生·경치 등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일)을 자주 했지요. 자연을 보면서 감격하는 일이 잦았어요. 특히 해가 넘어갈 때의 석양, 황혼에 대한 감격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대동강변에 서서 하늘을 붉게 물들인 노을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청년은 아름다운 노을이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스케치북에 그림으로 남겼어요. 그리고 가슴속에 간직해뒀던 그 장면을 커다란 캔버스에 다시 옮기곤 했습니다. 청년의 이름은 윤중식(1913~2012)입니다.

윤중식은 이중섭(1916~1956)과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근대 서양화가 중 한 명입니다.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살다 간 이중섭과 달리, 한국이 걸어온 격변의 100년 근대사를 함께하며 아픔과 기쁨을 고스란히 지켜본 화가랍니다.

올해는 그가 세상을 뜬 지 1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서울 성북구립미술관은 오는 7월 3일까지 윤중식 작가를 추모하는 전시 '회향'(懷鄕·고향을 그리며 생각함)을 열어요. 그의 가족이 미술관에 기증한 작품 500점도 공개됩니다. 미술관이 있는 성북동은 작가가 1963년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50년이나 살았던 정든 동네예요. 노을을 좋아하는 그에게는 '석양의 화가'라는 별칭이 붙어 있어요. 화려한 석양빛에 보일 듯 말 듯 스며 있는 그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6·25전쟁의 참혹함 그려

평안남도 평양 출신의 윤중식은 서양화를 배우기 위해 스물두 살에 일본 도쿄의 무사시노 미술대학(옛 제국미술학교)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 시절 우리나라에는 아직 서양화를 공부할 수 있는 미술대학이 없었고, 도쿄에는 유럽의 화가들에게서 배우고 돌아온 일본인 교수들이 있었거든요. 윤중식은 프랑스의 '야수파'(강렬한 원색을 특징으로 하는 화풍) 화가인 앙리 마티스(1869~1954)를 특히 좋아했는데, 마침 일본인 스승이 마티스의 제자였어요. 스승을 통해 야수파의 화풍을 익힌 그는 원색의 아름다움과 대담한 붓질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만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유학을 마치고 평안북도 선천의 보성여고에서 미술 교사로 일하면서 이중섭 등 당시 이북에서 활동하던 화가들과 함께 전시회를 열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6·25전쟁이 발발하고 1·4 후퇴 당시 남으로 내려왔습니다. 1951년 부산에 도착한 그는 피란길에 겪은 잊지 못할 전쟁의 참혹한 상황들을 기록화로 남겼어요. 전쟁통에 제대로 된 종이와 물감을 구할 수 없었기에, 낡은 종이 위에 몇 가지 되지 않는 색으로 표현해야 했지요.

〈작품 1〉은 그중 하나로, 불타는 마을을 등지고 온 가족이 폭격을 피해 남으로 향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중앙의 남자는 작가 자신이에요. 등짐을 지고 아이의 손을 잡고 있지요. 바로 뒤에서 아기를 업은 채 걸어가는 여자는 작가의 아내인데, 뒤돌아보며 지쳐 우는 소녀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줬어요. 아내와 함께 어린 세 자녀를 데리고 남으로 내려오던 도중, 폭격이 떨어지는 것을 피하다가 뒤따라오던 아내와 첫째 딸을 놓칩니다. 그들과는 결국 영영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함께 오던 젖먹이 막내도 죽고, 결국 아이 하나만 데리고 서울로 오게 됐죠.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첫째 딸을 찾으려고 윤중식은 전국의 고아원을 헤집고 다녔다고 합니다.



온 세상 물들인 노을 즐겨 그려

윤중식은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노을과 해거름이 지기 시작한 논밭의 풍경을 즐겨 그렸습니다. 수평으로 켜켜이 쌓듯 칠한 오렌지와 노랑, 그리고 주홍색은 윤중식을 특징 짓는 색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인상적입니다. 그는 이런 글을 남겼어요. "붉은 태양이 서쪽 산으로 기울어질 때면 석양은 찬란한 빛과 신비의 세계로 물들고 다양한 변화에 가슴마저 울렁거리게 된다."

〈작품 2〉 '전망'은 실내에서 발코니 창을 통해 바라본 석양의 모습입니다. 그림의 아래쪽은 새장과 꽃병이 있는 실내이고, 그 위로 넝쿨식물이 올라가는 담벼락이 보이네요. 위쪽으로 갈수록 먼 거리의 풍경이 펼쳐져서 비닐하우스와 볏단처럼 생긴 형태들이 간간이 나타납니다.

〈작품 3〉 '석양'은 '전망'보다 삼십 년 가까이 지난 후, 작가가 아흔을 갓 넘긴 2004년에 그린 작품이에요. 이 무렵 작가는 시력이 서서히 흐릿해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선명한 주홍빛으로 마음속에 새겨진 석양을 그렸습니다. 그 무렵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 기억만으로도 캔버스 위에 완벽한 색채 조화를 완성할 수 있었던 거죠.

석양이란 하루가 다 끝나가는 시간대의 고요하고 편안한 정서를 뜻합니다. 그는 마음이 차분해지는 동시에 까닭 없는 쓸쓸함에 잠기게도 하는 노을을 반복해서 그리며, 떠나온 고향을 떠올렸는지 모릅니다. 젊은 시절 대동강에서 바라본 석양을 다시는 그 자리에서 볼 수 없게 된 아쉬움이 그림 속에 숨겨져 있는 듯해요.



고향 떠올리게 하는 새, 비둘기

윤중식의 그림 속에 노을 다음으로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새입니다. '전망'에서도 새가 그려져 있었지요. 〈작품 4〉는 춤추며 노니는 듯 흥겹고 자유로운 모습의 새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언뜻 오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비둘기일 거예요. 왜냐하면 작가에게 가장 친근했던 추억의 새는 비둘기였거든요.

비둘기는 평양에서 정미소(방앗간)를 하던 그의 집 근처를 늘 맴돌았어요. 100마리도 넘는 비둘기가 집 마당으로 날아들었다고 하는데, 작가는 비둘기들을 쫓아내는 대신 처마 밑에 둥지 만드는 것을 도와주곤 했대요. 윤중식에게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자유로움, 그리고 좋은 시절을 의미하는 평화의 새가 바로 비둘기가 아니었을까요.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