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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실록 속으로] 단호히 물러나 ‘권력 중독자’ 아님을 증명한 태종 이방원

최만섭 2021. 12. 21. 04:41

 

[박현모의 실록 속으로] 단호히 물러나 ‘권력 중독자’ 아님을 증명한 태종 이방원

태종 “아비가 아들에게 전위하는 건 천하고금의 떳떳한 일”
승지들에겐 “18년간 호랑이를 탔으니 이미 충분하다” 밝혀
드라마 ‘태종 이방원’ 속 전위하며 울부짖는 모습 사실과 달라

입력 2021.12.21 03:00
 
 

역사 드라마 ‘태종 이방원’이 시작됐다. 첫 회 방송을 본 소감은 ‘아쉽다’이다. 역사 속 생생함을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드라마 첫 장면은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1418년(태종 18년) 음력 8월 8일 모습이다. 비가 쏟아지는 경복궁 사정전 뜰에 신하들이 엎드려 ‘전위(傳位)의 명을 거두어 달라’고 외친다. 사정전 안인 듯한 실내에서는 태종이 두 달 전 세자로 책봉된 충녕(세종)에게 말한다. “저 승냥이 같은 자들이 전위하겠다는 내 말을 믿지 않는다”면서 화를 낸다. 물건을 집어던지고, 용포와 머리를 풀어헤치며 울부짖는 부왕을 충녕은 그저 겁먹은 표정으로 바라본다.

과연 그랬을까? ‘태종실록’ 18년 8월 8일 기사를 보면 ‘큰비가 왔다’고 되어 있다. 비 쏟아지는 사정전 뜰 앞 장면은 제대로 고증된 것이다. 이날 비가 내리는 가운데 정오 무렵 태종은 의관을 정제하고 보평전(報平殿·훗날 사정전)으로 들어갔다. “옥새 찍을 일이 있으니 속히 대보(大寶·임금 도장)를 바치라”는 왕명을 전해 들은 승지들은 보평전 문 앞으로 달려와 취소를 요청했다. 태종은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사람을 보내 “세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그 사이 대신들이 보평문 앞으로 몰려와 하늘을 부르며 목 놓아 울면서[呼天痛哭·호천통곡] 비상한 거조(擧措)를 멈춰달라고 요청했다.

/일러스트=김성규

태종이 전위 의사를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이날 오전이었다. 경회루에 승지들을 불러놓고 “내가 재위한 지 벌써 18년”이라면서 전위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그 하나는 가뭄·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계속되니 하늘 뜻[天意·천의]이 떠나갔다고 했다. 실제로 사흘 전인 8월 6일부터 큰비가 계속 내렸다. 두 번째 이유는 자신의 병이다. “묵은 병[宿疾·숙질]이 근래 더욱 심해졌다”고 했다. 물론 핑계였다. 정무를 돌보지 못할 만큼 왕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기록은 그 전후에는 없다. 태종은 “아비가 아들에게 전위하는 것은[父傳於子·부전어자] 천하 고금의 떳떳한 일로서 신하들이 감히 간쟁(諫諍)할 성격이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드라마가 그려낸 태종과 충녕의 대화는 사실일까? 실록 기사를 보면 왕명을 받고 급히 달려온 충녕에게 태종은 보평전 옆문으로 나가 대보를 건네주려 했다. 하지만 충녕은 바닥에 엎드려 일어나지 않았다. 태종이 그의 소매를 붙잡아 일으켜 기어코 대보를 넘겨주었다. 몸 둘 바를 모르던 충녕은 대보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부왕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태종의 의지는 굳건했다. 충녕에게 경복궁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연화방(蓮花坊·서울 종로구 연지동) 세자전으로 갔다. 거소를 서로 바꾼 것이다.

 

신하들은 세자전에 가서 다시 왕위에 오르기[復位·복위]를 간청했다. 충녕 역시 부왕이 있는 세자전에 들어갔다. 드라마에서 태종이 충녕과 대화를 나눈 곳은 종로구 연지동에 있는 세자전 안이었다. 태종은 밤이 되자 충녕에게 말했다. “내가 전위를 말한 것이 두세 번이나 되는데, 어째서 내게 효도할 생각을 하지 않고 이렇게 어지럽게 구느냐? 내가 다시 복위한다면 나는 장차 온전히 죽지 못할 것이다[不得其死·부득기사]”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북두칠성을 가리켜 맹세했다. 왕위에 다시 나아가지 않겠다는 것을 목숨 걸고 다짐한 것이다. 8월 10일 태종은 결국 왕위를 충녕에게 물려주었다.

흥미로운 것은 8월 8일 오전에 태종이 승지들에게 한 말이다. 그는 “나의 상(像)과 모양은 임금의 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태종실록 총서를 보면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를 닮아서 ‘코가 높고[隆準·융준] 용의 얼굴[龍顔·용안]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 얼굴 모양이 임금 상이 아니라고 스스로 부정한 것이다. 태종은 또 “나는 위의(威儀)와 동정(動靜)이 모두 임금에 적합하지 않다”고도 말했다.

왜 그랬을까? 자신은 왕위에 오르지 못할 사람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왕 노릇 했다는 뜻으로 읽힌다. “18년 동안 호랑이를 탔으니[騎虎·기호], 또한 이미 충분하다[亦已足矣·역이족의]”고도 말했다. ‘역이족의(亦已⾜矣)’ 이 말이야말로 정치를 대하는 태종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가 정치를 시작한 이래 취했던 일련의 조치들, 예를 들어 정적 척살, 내·외척 제거 같은 행동들은 많은 오해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충분하다[已⾜]’라면서 과감히 권좌에서 물러남으로써 그는 권력 중독자가 아님을 증명했다.

산발한 머리로 피 묻은 손 위에 그릇 파편을 놓고 울부짖는 드라마 속 장면이 왜 필요한가? 태종실록 18년 8월 8일 기사만으로도 이렇게 생생한 이야기가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