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눌러듣는 여인은 아름답다!

최만섭 2020. 6. 7. 21:17

눌러듣는 여인은 아름답다!

 

갑자기 찾아온 편두통 때문에 하루하루의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자체가 힘들어졌다. 나이를 먹어 갈수록 오래된 자동차처럼 몸의 기능은 저하되고 조금만 과식이나 과음을 해도 몸이 탈이 나는 데다 불면증에 우울증 증상까지 겹치니 하루를 견뎌내는 것이 녹록지 않다

 

모든 병은 몸과 마음의 부조화에서 기인하는바, 나는 몸을 통해서 느낀 세상 부조리를 마음이 소화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종의 충돌 현상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바, 이 충격이 온몸과 마음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나와 똑같은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 세상 이치가 다 그렇듯이 만물은 둘이 아닌 하나다. 만물이 각기 따로 독립되고 대립하여 존재하는 것 같아도 따지고 보면 서로 상호보완적인 관계이며 그 기본이 되는 것은 하나다. 그래서 불이(不二)라고 하지 않는가? 작금의 정부가 불이(不二)를 거부하고 국민의 마음과 상치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으니, 가슴앓이 병에 걸리지 않은 국민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보수주의자다. 자유를 삶의 기본이 되는 가치라고 굳게 믿으며, 그 자유에 따르는 책임감을 신의 성실하게 실천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하며,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가난한 삶을 선택하는 사려 깊은 사람을 존경한다.

 

이러한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눌러 듣는 습관을 지녔다는 것이다. 국어사전에는 ‘둘러 듣다’를 “1. 사소한 잘못을 탓하지 않고 너그럽게 듣는다. 2. 그대로 계속 듣는다.”라고 표기되어 있다. 영어로 의역을 하면 “관용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자세(take a person's remark with kindly tolerance(with good grace)”라고 한다.

 

나는 일전에 나의 수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한자로 영어를 공부하여, 오역으로 그 진의가 왜곡되는 잘못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눌러 듣다에 가장 근접한 한자를 찾기 시작했고, 어렵지 않게 들을 청()을 발견했다.

 

(들을 청)자는 듣는다받아들인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들을 청)자는보고(-곧을 직) 듣고(-귀이) 느끼는(-마음 심) 사람(-천건 임)’을 뜻한다. 타인의 행동을 보고 듣고 이를 용서하고 살피는 사려 깊은 사람의 태도를 나타내는 글자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聽(들을 청)을 “남의 말이나 행동을 ‘보고(直) 듣고(耳)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心) 사람(壬)’의 태도라는 뜻이다. It means a person's attitude to see, hear, and accept others' words or actions with their heart.”라고 영역을 하였다.

 

일전에 21대 국회가 개원되었다. 내가 존경하는 박병석 의원이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나는 적어도 21대 국회의원들이 박병석 의장의 언행을 진심으로 조금이라도 배우려 한다면, 대한민국이 조금은 숨통이 트일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는다.

 

일부 소위 말해서 S 대 나온 엘리트 선량 중에서 우리 헌법에서 ‘자유’를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너무도 당당하게 발표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마음이 찢어지는 것은 나만이 느끼는 소회는 아닐 것이다. 그릇된 이념의 노예가 되어서 미친 망나니같이 거친 말을 쏟아내는 이들에게서, “S 대를 나와서 그 어렵다는 사시에 합격하고 판검사까지 지낸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가 그런 발언을 할 때는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나름 애국심의 발로겠지. 설마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여 대한민국을 팔겠나?” 하는 믿음은 절대 금물이다. 우리나라의 질곡의 역사가 이를 적나라하게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지식(知識)과 지혜(知慧)는 각각 따른 주체일 뿐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을사오적(乙巳五賊) 이완용도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며 엘리트였고, 조선공 산주의 운동의 선두자인 박헌영도 경성 교보를 나온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입을 열면 과거 지향적이고 인간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언어가 쏟아져 나오고 귀를 열면 미래지향적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인간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쌓인다고 한다. 내가 모두에서 언급한 박병석 국회의장은 말씀이 어눌하신 분이다. 지식이나 지혜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상대에 대한 배려 때문이다. 혀에 닿는 대로 과격한 언어를 휘둘러대는 함량이 모자라는 소위 말해서 엘리트 양아치쯤에 젖은 품격 없는 선량(選良)들과는 그 격이 다른 분이다

 

사실 헌법에서 ‘자유’를 빼는 것과 우리네 같이 먹고사는 문제에 매달려 사는 일반 시민과 무슨 연관이 있느냐? 라는 의구심을 갖는 국민이 많을 것이라고 짐작이 된다. 집안에서 어머니와 아들이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어머니의 보수적인 사고가 자신과 다르다 해도 모진 세월을 맨몸으로 맞서서 견디어온 분으로서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자세가 눌러 듣는 자세이며, 들을 청(聽)자가 만들어진 역사다.

 

이와 반대로 어머니가 옛날 사고방식에 젖어서 말이 안 통한다고 어머니 말씀을 무지르고 면박을 주고 자리를 뜨는 버리장 머리 없는 자식의 태도를 청이불문(聽而不聞, 듣고도 못 들은 척함)이라 하니, 가정이 평화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는 가족 구성원 각각의 자유를 존중해 주어야 하며, 그 전제조건이 눌러 듣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헌법에서 자유를 뺀다는 뜻은 정부는 입을 열어 국민에게 명령만 내리고 귀를 닫아서 국민의 소리는 묵살하겠다는 뜻이며, 이는 어머니 말씀에 귀를 막고 자기 잘났다고 고함을 질러서 가정의 평화를 깨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는 의미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헌법에서 ‘자유’를 제거하겠다는 망나니들 때문에 희망을 잃어버리고 잠을 제대로 못 자는 환자들이 기하급수로 늘어나고 있다. 이건 진보와 보수의 문제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문제도 아니다. 지혜롭지 못한 자와 지혜로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관점의 차이 일 뿐이다. 나는 감히 깨달은 사람으로서 주장한다. “눌러 듣는 여인은 아름답다!” “자유로운 여인은 매혹적으로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