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년 새해의 화두- 행복의 조건
2021년 신축년 새해에 나의 가장 절실한 소망은 병마로부터 해방되어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경험을 통하여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몸에 좋은 음식을 섭취하는 것보다는 몸에 해로운 음식을 피하는 것이 우선이라 사실을 깨달았다. 술 담배 지방 간편식 등의 섭취를 금하면 굳이 몸에 좋다는 건강 보조 식품이나 보약을 먹지 않아도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청소년 시기에 어떤 친구를 사귀느냐에 따라서 인생 항로가 바뀔 수 있다. 그만큼 교우관계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좋은 친구와 교유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나쁜 친구들을 멀리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가 물었다. “다들 찾습니다, 행복. 어떡하면 찾을 수 있습니까?” 올해, 만 101세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그 답을 불행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그 답을 대신했다. 그것은 내가 설명한 두 가지 예와 그 쾌를 같이한다. 불행하지 않은 상태가 행복이라는 이야기다. 크게 기뻐하는 행위 자체가 고(苦)라 하지 않는가?
1. 정신적 가치를 모르는 사람
김형석 박사는 말했다. “지금껏 살아보니 알겠더군요. 아무리 행복해지고 싶어도 행복해지기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크게 보면 두 부류입니다. 우선 정신적 가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물질적 가치가 행복을 가져다주진 않으니까요. 가령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과연 행복하게 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신적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많은 물건을 가지게 되면 오히려 불행해지고 말더군요.”
기자가 물었다. 돈이나 권력, 혹은 명예를 좇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행복을 찾습니다. “솔직히 거기서 행복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거기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돈과 권력, 명예욕은 기본적으로 소유욕입니다. 그건 가지면 가질수록 더 목이 마릅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배가 고픕니다. 그래서 항상 허기진 채로 살아가야 합니다. 행복하려면 꼭 필요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만족’입니다. 정신적 가치가 있는 사람은 만족을 압니다. 그런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더군요. 정신적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명예나 권력이나 재산을 거머쥘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불행해지더군요. 명예와 권력, 재산으로 인해 오히려 불행해지고 말더군요. 지금 우리 주위에도 그러한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나는 김형석 박사의 말하는 정신적 가치가 ‘만족’이라는 단어에 함축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일 전에 집사람이 모임에 다녀와서 초등학교 친구가 “너는 학교 다닐 때 우등상장을 받은 똑똑한 아이였는데, 왜 그렇게 못 사냐?”이라는 질문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몹시 황당했던 기억이 난다. 그분은 잘 산다는 의미를 재산의 많고 적음만을 따진 것 같다. 한 인간으로서 가난하다는 의미는 경제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빈곤까지 포함된다는 사실을 간과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탐진치(貪瞋癡)에서 가난한 마음의 원천을 찾는다. 탐(貪)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욕심을 뜻하는바, 탐(貪)의 뿌리를 제거하지 않고는 인간은 결코 진정한 의미의 빈곤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인간은 본래 모든 것을 갖추고 태어난다. 즉 구족(具足)을 가지고 태어난 부자다. 인간이 가난해지는 원인은 실제로 가난한 것이 아니라 가난이라는 불멸 망상과 착각에 가려져서 실체적인 우리 자신의 모습, 찬란하게 빛나는 부자의 형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원수 법사는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부처님께 바치지 아니하고 가지고 있으면 빈곤하게 되고 병이 들며 결국 재앙에 직면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가난하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부처님께 바치다 보면, 인간의 마음은 부처님 마음으로 동화되어서 부처님과 같은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이 70이 다되어서야 나 자신이 부자임을 깨달은 늦깎이 수행자이다. 나는 떠오르는 나의 모든 생각을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부처님에게 바치고 금강경 강의를 들으면서, 참선에 들을 때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서서히 올라오는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음미할 수 있었다.
나는 악성종양으로 인하여 4년 동안 죽음의 문턱을 오가며 혹독한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나름 선하게 살고자 노심초사하면서 살아온 나에게 왜 신은 이렇게 가혹한 시련을 안겨주는가? 게다가 내가 경험한 암 환우들은 모두 마음이 여리고 착한 사람들이었던 사실은 내게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인간들에게 내리는 신의 형벌은 그 형평성을 잃은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빠지게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야 나는 비로소 내가 나를 고문하고 괴롭히는 행위와 내가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행위가 결코 다르지 아니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자살도 타살과 같은 치명적인 죄악이라 하지 않는가? 따라서 내가 노심초사하며 올바르게 살고자 몸부림쳤던 행위 자체가 탐진치(貪瞋癡)이였으며, 특히 세상만사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조급함에 화를 내는 진심(賑心)이 악성종양의 표적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물론 병든 이유가 정신적인 것, 진심(瞋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음식, 생활 습관 등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이 세상에는 단 한 가지 원인과 이유만으로 설명되는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원인과 원리는 존재한다. 이를 무시하는 한 우리 인생의 역경과 고난에 대한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한 우리 인간은 부자가 될 수도 건강한 사람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2. 이기주의자
김형석 교수는 행복하게 살 수 없는 두 번째 유형을 이기주의자라고 못 받았다 “두 번째는 이기주의자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이기주의와 행복, 왜 공존이 불가능한가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이기주의자는 자신만을 위해 삽니다. 그래서 인격을 못 가집니다. 인격이 뭔가요. 그건 인간관계에서 나오는 선한 가치입니다. 이기주의자는 그걸 갖추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인격의 크기가 결국 자기 그릇의 크기입니다. 그 그릇에 행복을 담는 겁니다. 이기주의자는 그릇이 작기에 담을 수 있는 행복도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김형석 박사의 행복의 전제조건인 이타주의를 설명하기 위하여, 역설적으로 기복신앙에 대한 나의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기복신앙(祈福信仰, faith for blessing)이란 복을 기대하는 신앙, 즉 본인에게 득이 되는 복(福)을 바라는(祈) 신앙 행태를 말한다. 여기서 '복'이란 재물, 무병장수, 내세의 공덕, 자손의 번창 같은 모든 인간적 욕심을 포함한다.
나는 기복신앙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현실적인 행복을 등한시하는 종교나 사상의 존재가치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입장이다. 신을 믿는 대가로 자신이나 가족의 물질적인 충족(富)과 건강과 혈통 같은 욕망, 즉 세속적인 복을 기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는 못하나, 그렇다고 그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도 불합리하다는 생각이다. 문제는 이러한 개인적인 욕망을 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세속적인 복을 착각인 줄 알고 부처님에게 바치면, 결국에는 개인의 삶도 윤택해진다는 섭리를 믿고 그렇게 행동하면 삶은 행복할 수밖에 없다. 동양적 관점에서 이타주의는 결국 나와 너, 나와 우리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진리를 얼마나 실감하느냐의 문제며, 우리 모두를 위한 행위가 결국 자신에게도 복(福)이 되어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얼마나 믿느냐의 문제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개인적 이기주의를 넘어서 이념적 이기주의, 집단적 이기주의로 나라가 둘로 갈라질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있다. 조선일보에 기고한 박종인의 땅의 역사에 의하면, “조선이 문호를 막 개방하려던 1870년대 조선 지식인들은 청나라 사람 위원이 쓴 ‘해국도지(海國圖志)’에 큰 충격을 받았다. 세상은 황제국 청(淸)과 조선과 기타 오랑캐가 사는 수직적 천하(天下)인 줄 알았는데, 그 책에는 오랑캐가 아닌 ‘막강한 서양(西洋)’이 있고 ‘세계(世界)’가 있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적 질서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신세계였다. 청과 일본 지도자들은 이 책을 통해 자강(自强)과 개화(開化)로 방향을 바꿨다. 조선에서는 개화파 시조 박규수와 김옥균, 유길준 같은 제자들이 개화를 꿈꿨다. 세월은 막 흘러갔고 청은 자강에 실패했고 조선 또한 자강에 대 실패했다.”라며 지식을 대하는 조선 사대부들의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3. 지식(知識)과 지혜(智慧) 차이
1870년대 조선은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세상에 맞는 체제로의 변화를 거부했다. 그 원인은 체험과 실험으로 이루어지는 지식은 사용 연한이 있어서, 시대에 맞지 않고 뒤떨어지면 언제라고 강물에 떠내려 보내야 한다는 만고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그들이 그토록 목을 매는 이념이 지혜가 아닌 지식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끝까지 가슴에 끌어안고 사수하다가, 국가와 백성을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갖다 바치고 말았다. 2021년 신축년 새해에도 조선 사대부들이 저지른 망국적 행태를 재현하려는 자들이 부활하고 있어서 통탄을 금할 수 없다.
지혜(知慧)란 인간의 마음이며 지식과 이념은 그 대상이다. 지혜(知慧)의 슬기로운 혜(慧)자는 빗자루 혜(彗)지와 마음(心) 자가 결합한 형태다. 마당을 빗자루로 깨끗이 청소하듯이 마음을 닦는 것이 지혜라는 이야기다. 끊임없는 수행으로 분별심이 소멸하면 지혜로운 마음으로 지식과 이념을 선명하게 볼 수 있음으로, 지혜는 지식과 이념의 이치를 확실히 이해하고 또한 통솔하는 탁월한 지휘관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지혜로운 만큼 세상이 보인다는 이야기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지혜보다는 지식과 이념을 우선시하는 망국적인 풍토가 이기주의를 부추기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념적, 집단적 이기주의는 근본적으로 치심(癡心), 이만하면 되었다 하는 오만함에서 기인한다. 치심(癡心)을 무조건 부처님에게 바쳐야 한다. 치심(癡心)을 하느님에게 무조건 바쳐야 한다. 우리 모두 이기주의가 치심이며 불멸 망상이며 착각이며, 이러한 치심을 마음속에 계속 가지고 있으면 경천(輕賤)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나는 모두에 언급한 우리 집사람 친구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다. “나는 부자임을 깨달아 가는 진짜 부자입니다. 불멸 망상에 가려져 있던 나 자신의 진면모,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는 부자, 찬란하게 빛나는 나 자신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부처님께 바치고 금강경 독송을 들으면서 참선에 들기 시작한 이후부터 나의 삶은 매우 달라졌다. 성공이란 무엇일까? 내가 정말로 원하는 꿈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갈망하면서 불면의 밤을 지새울 때, 성공하려는 공학적 계산을 함으로써 그 꿈이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반대로 모든 생각을 부처님께 바치고 오직 부처님 시봉하는 데 쓰이게 해달라고 기원하면 그 꿈은 이루어졌다. 나는 병마를 극복하고 어렵사리 중소기업에 취업해서 나름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 비록 서울 위성도시 변두리에 아파트 한 채가 전 재산이지만, 마음만은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로서 살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고 이타적인 행동을 실행함으로써 자연히 수반되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신축년 새해에 모든 분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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