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님에 점 하나 찍으면 도로 남 ♪"… 세종대왕도 놀랄 대중가요 속 우리말

최만섭 2020. 3. 12. 05:45

"님에 점 하나 찍으면 도로 남 ♪"… 세종대왕도 놀랄 대중가요 속 우리말

조선일보
  • 한성우 인하대 교수      | 수정 2020.03.12 03:14

[조선일보 100년 기획 -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24] 가요에 담긴 아름다운 한국어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 한 곡에 담긴 울고 웃는 인생사
꿍따리샤바라·담다디·링딩동… 젊은층도 즐기는 고려가요 후렴구

나, 너, 사랑. 우리 가요에 등장하는 단어를 빈도 순위로 뽑아보면 이렇다. '나'와 '너'는 대명사이니 명사 중 으뜸인 '사랑'에 더 눈길이 가는데, 일상 언어에서는 받침 하나 바꾼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와 '너'도 사람이니 결국 가요는 수많은 사람 중에 '내가 너에게 하는 사랑 고백'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사랑 타령이라 일컫는 우리 가요, 이 속에는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지만 울고 웃는 우리의 모든 인생사가 담겨 있기도 하다.

노랫말 속 사랑은 묘하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제목처럼 '이별'과 '눈물'이 뒤를 따르고, '슬픈, 아픈, 지독한'의 수식을 받는다. 너무도 괴로워서 '사랑만은 않겠어요'라고 하면서 끊임없이 아픈 사랑 노래가 만들어진다. 기쁘고 행복해야 할 사랑이 이렇게 표현되는 것은 노래가 주는 위로가 얼마나 큰지 보여준다. 사랑할 '너'와 만나지 못했을 때, 사랑했던 '너'와 헤어졌을 때 노래만은 남아서 위로해 준다. 사랑에 빠졌을 때는 잊고 지내다 혼자일 때 사랑에 대한 갈급함을 채워주니 가요 속의 사랑은 이렇게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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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히트곡을 남긴 가수 윤복희가 열창하는 모습. /허영한 기자

노래는 사시사철 이어지는 인생사 모두를 담고 있지만 노랫말에 등장하는 계절의 최고봉은 역시 가을일 듯하다. 빈도를 따져 보면 봄이 첫째이고, 겨울과 여름이 그 뒤를 이으니 가을이 맨 끝이다. 그럼에도 가을을 가장 앞자리에 놓는 것은 깊이와 감동에 따른 일종의 착시 현상이다. 이별, 슬픔, 외로움이 한껏 고조된 계절 가을, 노래에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으니 이 계절을 노래한 것이 오래 기억된다.

노랫말 속 '너'를 구체화해 보면 노랫말은 여성의 세계이다. 제목과 가사 모두에서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이 등장한다. '어머니'와 '아내'는 '아버지'와 '남편'을 압도한다. 여성이 더 많이 노래를 듣고, 노래에 더 많은 투자를 하니 나타나는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래도 남자들이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선생님'과 '오빠' 때문이다. 노랫말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직업이 선생님인데 대부분 남자로 그려진다. '누나'는 극히 드문 데 비해 '오빠'는 세월이 흐를수록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물론 이 오빠는 '오빠는 풍각쟁이야'의 오빠가 아니라 '오빠 한번 믿어 봐' 속 오빠이다.

요즘의 아이돌들도 '고려가요'를 부른다. '얄리얄리 얄라셩'이나 '위 증즐가 太平聖代(태평성대)'와 같은 후렴구가 그것이다. '얄라셩'은 '꿍따리샤바라'와 '담다디'를 거쳐 '링딩동'까지 이어지더니 이른바 후크송에서 수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의미를 파악해 보면 별 뜻이 없는 영어 후렴구는 '太平聖代'와 그 맥이 닿아 있다. 우리 시의 전통을 잘 계승한 김소월의 시가 가장 많이 노래로 만들어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의 노래 또한 그 전통의 맥락 속에 있는 것이다.

'희망가'부터 '페이크러브'에 이르기까지 모든 노랫말을 분석해 봤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노랫말은 '낭만에 대하여' 속의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이다. 첫사랑의 대상을 사람이 아닌 노래로 치환하면 그 느낌이 더 선명해진다. 순수했던 시절 귀로 들어온 그 노래가 저마다의 가슴속에서 나처럼 늙어버렸다. 그러나 오래된 노래라고 여겨졌던 트로트가 부활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첫사랑 그 노래는 순수했던 그 시절로 되돌려준다.

가요 100년의 노래 중 하나를 꼽으라면 강산에의 '라구요…'다. 일제강점기의 '눈물 젖은 두만강'에서 한 소절을 따오고, 한국전쟁을 그린 '굳세어라 금순아'에서 또 한 구절을 따 와서 마지막에 '라구요'만 붙여 불렀다. 그럼에도 우리의 현대사와 우리의 가요사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지금의 노래를 첫사랑 그 소녀처럼 가슴속에 간직해 가는 이들은 어떤 노랫말 뒤에 '라구요'를
붙일까?

☞한성우

한성우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는 남도(南道)부터 옌볜까지 전국을 떠돌며 우리말을 수집하는 방언 연구자다. '방언정담' '우리 음식의 언어' 등을 썼고 저서 '노래의 언어'에서는 유행가 26250곡, 원고지 75000매 분량의 노랫말을 통계로 분석했다. 본지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에서 경기 지역 단어 검수를 맡고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12/202003120021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