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0.03.11 03:00
[인물과 사건으로 본 조선일보 100년] [19] 신문 삽화의 귀재, 정현웅
조선일보·조광사서 8년 일하며 채만식·한용운·백석 등 작품에 삽화 등 총 3230여점 그려
화면을 찢는 영화적 기법 시도… 시대 앞서가며 화단 이끌어
"용환씨, 좀 있으면 세상이 바뀝니다. 좀 자중하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1945년 중반, 출판사 '조광사'의 삽화가 정현웅(1911~1976·작은 사진)이 내놓은 나직한 대답에 김용환(1912~1998)은 깜짝 놀랐다. 일본 출판계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유명했던 김용환이 "자원입대한 조선 청년이 중국에서 활약하는 무용담을 신나게 그려달라"며 원고 청탁을 했지만, 정현웅은 그 자리에서 딱 잘라 거절했다. 조광사는 조선일보가 폐간 뒤 운영하던 출판사였고, 김용환은 1950년대 '코주부 삼국지' 등 작품으로 인기를 끌게 되는 만화가다. 생전의 김용환은 "(정현웅의) 이 말이 곧 일본 패망을 의미함을 알고는, 일본 경찰의 사기가 이토록 등등한데 어쩌자고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정현웅의 안목과 심지 굳은 성정을 웅변하는 일화다.
'조선미전 특선화가' '혜성처럼 등장한 삽화가' '당대 최고의 장정가' '날카로운 미술 비평가' '고분벽화 모사가' '출판미술의 선구자' '아동미술의 대가' 그리고 잡지 '신천지'를 펴낸 언론인. 정현웅의 이름 앞에는 다양한 호칭이 붙는다.
정현웅은 경성 제2고보에 다니던 16세 때 조선미전에 처음 입선했고, 1944년까지 13차례에 걸쳐 작품 19점이 특선 또는 입선을 했던 기록을 가진 화가였다. 그럼에도 일제 말기에 전쟁 선동을 목적으로 친일 단체가 주도하는 수많은 전시회에는 단 한 번도 출품한 적이 없었다.
1945년 중반, 출판사 '조광사'의 삽화가 정현웅(1911~1976·작은 사진)이 내놓은 나직한 대답에 김용환(1912~1998)은 깜짝 놀랐다. 일본 출판계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유명했던 김용환이 "자원입대한 조선 청년이 중국에서 활약하는 무용담을 신나게 그려달라"며 원고 청탁을 했지만, 정현웅은 그 자리에서 딱 잘라 거절했다. 조광사는 조선일보가 폐간 뒤 운영하던 출판사였고, 김용환은 1950년대 '코주부 삼국지' 등 작품으로 인기를 끌게 되는 만화가다. 생전의 김용환은 "(정현웅의) 이 말이 곧 일본 패망을 의미함을 알고는, 일본 경찰의 사기가 이토록 등등한데 어쩌자고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정현웅의 안목과 심지 굳은 성정을 웅변하는 일화다.
'조선미전 특선화가' '혜성처럼 등장한 삽화가' '당대 최고의 장정가' '날카로운 미술 비평가' '고분벽화 모사가' '출판미술의 선구자' '아동미술의 대가' 그리고 잡지 '신천지'를 펴낸 언론인. 정현웅의 이름 앞에는 다양한 호칭이 붙는다.
정현웅은 경성 제2고보에 다니던 16세 때 조선미전에 처음 입선했고, 1944년까지 13차례에 걸쳐 작품 19점이 특선 또는 입선을 했던 기록을 가진 화가였다. 그럼에도 일제 말기에 전쟁 선동을 목적으로 친일 단체가 주도하는 수많은 전시회에는 단 한 번도 출품한 적이 없었다.
그가 생계를 위해 선택한 것은 출판 삽화였다. 동아일보에서 일하다 1936년 8월 일장기 말살 사건에 휘말려 해직된 뒤, 그해 12월 아동문학가 윤석중의 설득으로 선택한 새 둥지가 조선일보였다. 채만식의 '탁류', 한용운의 '박명' 등 연재소설 삽화, 좌담회의 인물 스케치 등이 그의 손끝을 거쳐 지면을 빛냈다. 평전 '시대와 예술의 경계인 정현웅'(2012·돌베개)에 따르면, 그가 8년간 조선일보와 조광사에서 일하며 그린 그림은 신문 삽화 1400여 점, '조광' '여성' '소년'을 포함한 잡지 삽화 1830여 점 등 총 3230여 점에 달한다. 그의 그림은 회화적 완성도가 뛰어났고, 화면을 찢고 나오는 영화적 기법을 시도하는 등 늘 시대를 앞서갔다.
그에게 삽화는 벽에 걸리거나 병풍으로 놓고 보는 것이 아닌, 보통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살아 있는 그림이었다. 그는 삽화를 "말하자면 쓰레기 속의 미술"이며 "항상 움직이고 있는 세상의 활발한 현역품으로서의 역할을 가진 것"이고, "소설의 설명도가 아니라, 하나의 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는 예술적인 동시에 대중적인 작품"이라고 말했다.
책 표지를 아름답게 꾸미는 도서 장정(裝幀)에도 당대의 1인자였다. 강제 폐간 뒤 조선일보가 조광사를 통해 펴낸 '조선창극사' 같은 책이 그의 손을 거쳤다. 작가 최정희는 "정현웅이 장정한 책들은 책을 제본하는 실용적 차원을 넘어 예술적 가치를 지녔다"고 평했다.
정현웅은 당대의 거인들과 조선일보에서 만나 서로를 알아보고 지기(知己)가 되었다. 윤석중이 잡지 '소년'을 편집하면 정현웅은 삽화를 그렸다. 두 사람은 독자 투고를 함께 고르다 시인 박목월을 발굴했다. 잡지 '여성'을 편집한 시인 백석과 정현웅의 조선일보 출판부 책상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여성' 1938년 3월호에 백석이 실은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삽화도 정현웅의 작품이었다. 정현웅은 백석의 옆모습 스케치에 "미스터 백석의 프로필은 조상(彫像)과 같이 아름답다. 서반아 투우사의 옷을 입히면 꼭 어울릴 것"이라고 적었고, 백석은 1939년 10월 조선일보를 사직한 뒤 만주 여행을 떠나는 열차 안에서 '정현웅에게'라고 부제를 단 헌시 '북방에서'를 썼다.
6·25 때 월북한 그는 전봉준·이순신·강감찬·을지문덕·서희·계백 등 위인들의 행적을 그림으로 남겼고, 북한에서도 출판미술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모사와 복원 작업에도 헌신했다.
그에게 삽화는 벽에 걸리거나 병풍으로 놓고 보는 것이 아닌, 보통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살아 있는 그림이었다. 그는 삽화를 "말하자면 쓰레기 속의 미술"이며 "항상 움직이고 있는 세상의 활발한 현역품으로서의 역할을 가진 것"이고, "소설의 설명도가 아니라, 하나의 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는 예술적인 동시에 대중적인 작품"이라고 말했다.
책 표지를 아름답게 꾸미는 도서 장정(裝幀)에도 당대의 1인자였다. 강제 폐간 뒤 조선일보가 조광사를 통해 펴낸 '조선창극사' 같은 책이 그의 손을 거쳤다. 작가 최정희는 "정현웅이 장정한 책들은 책을 제본하는 실용적 차원을 넘어 예술적 가치를 지녔다"고 평했다.
정현웅은 당대의 거인들과 조선일보에서 만나 서로를 알아보고 지기(知己)가 되었다. 윤석중이 잡지 '소년'을 편집하면 정현웅은 삽화를 그렸다. 두 사람은 독자 투고를 함께 고르다 시인 박목월을 발굴했다. 잡지 '여성'을 편집한 시인 백석과 정현웅의 조선일보 출판부 책상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여성' 1938년 3월호에 백석이 실은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삽화도 정현웅의 작품이었다. 정현웅은 백석의 옆모습 스케치에 "미스터 백석의 프로필은 조상(彫像)과 같이 아름답다. 서반아 투우사의 옷을 입히면
6·25 때 월북한 그는 전봉준·이순신·강감찬·을지문덕·서희·계백 등 위인들의 행적을 그림으로 남겼고, 북한에서도 출판미술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모사와 복원 작업에도 헌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