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이찬원과 송가인이 달래준 '코로나 블루'

최만섭 2020. 3. 10. 05:46

입력 2020.03.10 03:16

진도빼기·진또배기 언어유희에 팬카페는 0010~6070 세대 아울러
트로트로 경험한 우정·사랑·연대… 코로나로 얼어붙은 마음 녹여

어수웅 주말뉴스부장
어수웅 주말뉴스부장
'코로나 우울증'은 예외 없었다. 분투 중인 환자와 의료진, 그리고 자영업자에게는 한가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아들 둘의 개학 연기와 삼시 세끼 집밥이 부른 모자(母子)의 불화는 거의 참사 수준. 특히 휴교 연장에 환호하며 기상 시간을 정오(正午)로 미룬 장남을 보다 못한 아내는 폭발했다. "학교가 쉬니까 집에서라도 진도빼기를 좀 해야 하잖아!" 이후의 얼음 같은 정적을 깨뜨린 건 초등생 막내의 흥겨운 한가락이었다. "진도빼기, 진또배기, 진또배기~."

트로트는 한(恨)의 노래라는 편견이 있었다. 아니었다. 트로트는 흥(興)의 노래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진또배기'를 부른 이찬원의 팬이 됐다. 노래 실력도 실력이지만 특유의 눈웃음으로 한 집안의 가정불화를 한 방에 보내버린 24세 청년. 내친김에 그의 팬카페를 들어갔다. 아이돌 팬카페와 극명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 0010방부터 2030·4050방에 이어 6070방까지, 세대를 아우르고 있었다. 자신의 카톡 프로필을 이찬원 얼굴로 장식했다고 고백하는 0010 소녀, 내 아들만큼 잘되기를 바라보기는 처음이라는 4050 엄마, 사회적 거리 두기로 '집콕'하고 있지만 '찬원'님의 미소가 있어 외롭지 않다는 6070 장년…. 한 팬은 "언니·동생님들 저 이렇게 많이 웃어도 될까요"라고 썼다. 코로나로 얼어붙은 마음들을 녹이는 위로가 거기 있었다.

내친김에 두 번째 편견도 고백한다. 소위 '팬픽'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이 조어가 낯선 중·장년 독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Fan Fiction'의 합성어다. 청소년 팬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혹은 스포츠 스타를 주인공 삼아 쓴 로맨스나 판타지 등의 2차 창작물. 하지만 각각의 팬에게는 우러러 떠받들 대상일지라도, 그들에게 관심 없는 대중에게는 무의미한 하위 장르일 뿐이다. 기자의 고정관념을 잘 알고 있는 후배가 송가인 팬픽을 읽어봤냐고 물었다. '생선 장수 이야기'라는 제목의 짧은 소설을 먼저 읽었다. 놀랍게도 그 안에서 송가인은 숭배의 대상도, 로맨스의 주연도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생선 파는 엄마를 평생 부끄러워하던 청년이 주인공이다. 최근에는 장사할 때 엄마가 흥얼거린다는 이유로 그 노래를 부른 송가인마저 싫어했다. 하지만 날아든 비보(悲報). 영안실에서 차가운 주검으로 남은 엄마의 지갑 안에는 사진 두 장이 들어 있었다. 한 장은 아들인 자신, 나머지 한 장은 송가인. 이튿날 장례식장, 뜻밖에도 송가인이 직접 조문을 왔다. 당황하는 아들에게 '미스트롯'은 말한다. '어머니는 날마다 제 팬카페에 들어와 글을 쓰셨어요. 생선 장수 아들이라고 친구들이 놀리지만, 당신에게는 둘도 없는 효자라고 쓰셨죠. 내 노래를 들으면 행복해서 좋다는 말도. 저도 무녀의 딸이라고 주변에서 놀림받았지만, 엄마가 부끄럽지 않아요….' 불효자 아들은 이후 마트 점원 일을 그만두고 가업을 이어받는다. 어머니가 장사하던 골목에서, 하루종일 송가인의 노래를 들으며, 오늘도 총각은 생선을 파는 것이다.

송가인 팬픽들은 이런 식이었다. 골방에서 잠드는 미용실 막내에게 송가인이 '서울의 달' 주제가를 불러주고, 죽은 엄마 사진 앞에서 오열하는 아들에게 '엄마 아리랑'을 부른다. 그렇게 주인공들은 노래를 통해 힘을 얻고, 우정·사랑·연 대의 가치를 깨달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번 주 '미스터트롯'이 최종 우승자를 결정한다. 코로나로 엄중한 이 시기에 무슨 한가한 트로트 타령이냐고 말할 사람이 혹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를 구원하는 건, 늘 그렇듯 작고 사소한 일상들. 부모, 자식이 함께 TV 보며 울고 웃은 지가 얼마 만일까. 촌스러운 신파라고 무시했던, 이 소박한 장르를 사랑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09/202003090370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