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베토벤이 들려주고 싶었던 건, 소리 뒤에 숨은 침묵"

최만섭 2017. 9. 2. 19:39

"베토벤이 들려주고 싶었던 건, 소리 뒤에 숨은 침묵"

입력 : 2017.09.02 03:01

[건반 위 求道者 피아니스트 백건우… 독주회 '끝없는 여정']

10년 만에 베토벤 소나타 全曲 예술의전당서 7일간 연주
"매일 새로운 音 떠올라 가슴 뛰어"

피아니스트 백건우(71)가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 5번을 치고 있을 때였다. 지난 6월 제주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열린 '지적장애인과 함께하는 백건우의 음악여행'. 누군가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자폐증을 앓는 20대 젊은이였다. 청년은 연주 중인 그의 곁에서 건반을 눌렀다. 다행히 소리가 크지 않아 연주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지만 60년 연주 인생에 그처럼 어리둥절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세 번째 곡으로 베토벤 소나타 10번을 칠 때에는 한 꼬마가 무대로 걸어들어오는 게 눈에 보였어요. '어이쿠, 쟤는 또 뭘 하려고?'" 30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만난 백건우는 그때를 떠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아이는 피아노 옆에 가만히 서서 건반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졌어요. 그런 소동이라면 또 일어나도 좋아요. 우리 셋 모두에게 잊지 못할 시간이었으니까요."

백건우는“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것이 보인다. 그래서 지루할 틈이 없다”고 말했다.
백건우는“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것이 보인다. 그래서 지루할 틈이 없다”고 말했다. /빈체로
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막 오른 독주회 '끝없는 여정'을 준비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그는 연습실에 박혀 있었다. 오는 8일까지 일주일 동안 베토벤이 전 생애에 걸쳐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전곡(全曲·32곡)을 완주하는 '수행'에 나선다. 2007년 같은 공연장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소화한 지 10년 만이다. 피아노 소나타는 교향곡, 현악사중주곡과 더불어 베토벤의 창작을 뒷받침해주는 세 개의 기둥 가운데 하나. 19세기 독일 지휘자 겸 작곡가 한스 폰 뷜로가 '신약성서'에 비유했듯이 피아노 음악사(史)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베토벤은 피아노의 모든 걸 근본부터 바꿔 아예 '새로운 피아노'를 만들어낸 사람. 그처럼 독특한 화음, 폭넓은 소리, 풍부한 악상을 구사한 작곡가가 없다"고 했다. "베토벤이 '침묵'을 사용한 방식"도 중요하다고 했다. "소나타 3번의 느린 부분을 보면 띠리라 띠라 흘러간 다음 긴 침묵이 와요. 침묵을 살리기 위해 앞의 음이 존재하는 겁니다."

"소나타 17번 '템페스트'에서도 박력 있는 화음이 네 번 연속 울리지만 그 사이의 침묵은 다 다르게 강조된다"고 했다. "삶도 그래요. 목표를 향해 정신없이 내달리다 문득 멈춰 서서 내 안의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 그게 있어야 생각과 인품이 향기로워지지 않겠어요?" 백건우는 "아름다운 음들을 쏟아내다가도 결국 베토벤이 들려주고 싶었던 건 소리 뒤에 숨어 있는 침묵인 것 같다"고 했다.

일흔이 넘었지만 하루 최소 네 시간씩 연습한다. "다음 날 일어나면 또 다른 말이 들리고, 또 다른 해석이 떠오르니 자꾸 가슴이 뛴다"고 했다. 녹초가 된 심신은 영화를 보며 달랜다. 백건우는 비디오테이프 1500개에 영화 3000편을 녹화 뜬 영화광(狂)이다. 이탈리아 거장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페데리코 펠리니처럼 감독의 예술세계가 뚜렷한 작품을 좋아한다. 열 살 때 콘서트에 데뷔한 지 60년. 만약 영화감독이 되어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영화로 찍는다면 제목을 뭐라 붙일까. "끝없는 여정? 허허! 농담이고. 이제껏 못해본 걸 담고 싶어요. 인생이란 건 미완성이고 우리 삶도 끝나기 전에는 미완성이니까." '건반 위의 구도자(求道者)'는 연습실로 다시 빨려 들어갔다.

▷백건우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8일까지(3일 2회 공연·4일 공연 없음)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02)599-5743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01/201709010332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