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Why] "잘해, 언니"… 먼저 떠난 여동생의 이 한마디로 버텼다

최만섭 2017. 9. 2. 17:47

[Why] "잘해, 언니"… 먼저 떠난 여동생의 이 한마디로 버텼다

입력 : 2017.09.02 03:02 | 수정 : 2017.09.02 11:40

[송혜진 기자의 느낌] 해외 유명 백화점 등 50여개 매장… 내년 데뷔 30주년 맞는 우영미
"쌀이 없어도 꽃은 샀던 철부지 아버지… 그 덕에 '멋'을 몸으로 익혀"
해외서 더 유명한 남성복 디자이너

지난 6월 초 프랑스 파리 프렝탕 백화점 계단을 오르내리던 우영미(58)는 문득 숨을 멈췄다. 어디선가 "언니, 잘 해" 하는 환청(幻聽)이 들렸다. 2015년 암으로 세상을 떠난 막냇동생 우장희(48)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았다. 우영미와 25년을 함께 일했던 동생 장희씨다. 쇠약해진 몸으로 더는 버틸 수 없어 회사 전무직을 내려놓던 날, 그는 언니를 바라보며 딱 한마디 했다고 했다. "잘 해"라고.



기뻐해도 좋을 날이었다. 그가 평생 일궈온 두 남성복 브랜드가 모두 파리에서도 콧대 높기로 유명한 프렝탕 백화점에 단독 매장으로 들어선 것을 눈으로 확인한 날이었다. 1988년 국내에서 시작한 남성복 '솔리드 옴므(Solid Homme)'는 지난 7월 이 백화점 2층에 버젓이 단독 매장을 열었다. 2002년 파리에서 첫 쇼를 시작한 최고급 남성복 브랜드 '우영미(Wooyoungmi)'도 올해 1월 이 백화점 4층에 따로 간판을 내걸었다. 파리만 이 두 브랜드에 자리를 내준 것이 아니다. 현재 '솔리드 옴므'는 미국 삭스피프스 백화점 등 해외에 15개 매장을, '우영미'는 프랑스 봉마르쉐·프렝탕 백화점, 영국 해러즈 백화점 등 해외 33개 매장을 거느리고 있다. 국내 대기업 패션회사가 수년간 돈을 쏟아부으며 투자해도 해내지 못했던 일이다. 우리나라 디자이너로선 유일무이한 성과다. 내년엔 데뷔 30주년을 맞는다.

최근 서울 신사동에서 우영미를 만났다. 오전 11시에 그는 선글라스를 낀 채 말했다. "돌아보면 스스로도 대견하지만, 사실 그만두고 싶을 때도 참 많았어요. 더는 못 견딜 것 같은 순간도 있었고요. 멈추고 싶을 때마다 나를 채찍질한 건 동생이었죠…." 말끝에 선글라스 아래 콧날이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지난달 말 서울 신사동에서 만난 우영미는 자신이 만든 옷 사이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지난달 말 서울 신사동에서 만난 우영미는 자신이 만든 옷 사이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어느 대기업 회장님이 여기 와서 이래요. ‘옷 이래 깐깐하게 만들면 뭐하나. 홈쇼핑 안 하고 라이선스 안 팔고. 돈 벌겠나?’ 저는 대답했죠. ‘원래 패션이 수지가 안 맞는 일’이라고. ” 30년을 축적한 디자이너의 답다웠다. / 이태경 기자

느티나무 같던 동생의 죽음

―동생 우장희 전무가 세상을 떠난 게 2년 전이죠.

"아직도 충격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질 못했어요. 나보다 담대하고 용감한 친구였어요. 내가 꼼꼼한 완벽주의자였다면, 동생은 보다 즉흥적이고 도전을 즐겼죠. 매사 내가 '해도 될까' 갈등할 때 그 애는 언제나 옆에서 딱 한마디를 던지곤 했죠. '해야 되는 거 아냐?'라고요(웃음)."

―2002년 파리 진출할 때도 그랬겠죠.

"남성복 시장은 좁고, 우리나라 대기업과 경쟁하면서 백화점 유통 시장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면 때론 내가 만들기 싫은 옷도 만들어야 했어요. 더 많은 남자에게 내 맘대로 지은 옷을 입힐 순 없나 고민할 때 동생이 '그럼 해외로 나가자'고 했죠. 둘이서 쇼에 내놓을 옷을 이고, 지고 한밤중 파리 공항에 딱 내렸는데 비가 쏟아지더라고요. 짐은 많고, 택시는 안 잡히고…. 그때 속으로 '나 여기 왜 왔지?' 했는데 동생이 택시를 불러 세우며 제게 이랬죠. '언니, 가자!'"

우영미는 늘 소심하고 조용한 우등생이었다. 원래는 미대를 가려 했다. 1978년 성균관대 의상학과에 입학했고, 1986년 우리나라 대학생 대표로 뽑혀 일본 오사카 인터내셔널 패션 콘테스트에 나갔다. 프랑스 에스모드, 영국 세인트 마틴, 이탈리아 마랑고니 같은 쟁쟁한 패션학교 출신 디자이너 지망생들이 한꺼번에 몰려온 자리였다. 심사위원 중에는 일본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도 있었다. 우영미는 이 대회에서 3등상을 받았다. 첫 인터뷰도 아사히신문 기자와 했다.

―한국에선 그런 대회가 있는지도 잘 모를 때 아닙니까.

“그럼요. 우리나라에는 의상학과도 별로 없었고, 복식학원 몇 개가 있을까 말까. 다른 학생들은 학교 교장 선생님까지 대동하고 왔는데, 나만 혼자 왔죠. 그때 처음 봤어요. 외국에선 패션 디자인을 어떻게 하는지. 한국에서는 나 혼자 옷본 뜨고 미싱 돌렸는데, 그들은 팀을 짜서 움직이더라고요. 기가 죽으면서도 약이 올랐죠. ‘언젠간 내가 실력으로 다 이길게’ 했죠(웃음).”

반도패션(LG패션의 전신)·뼝뼝 같은 회사를 다니다 1988년 서울 신사동 작은 가게에서 ‘솔리드 옴므’를 론칭했다. 재봉사 두 명 데리고 시작한 가게였다. 하늘하늘한 여성복보다 무덤덤한 남성복을 좋아했던 우영미였다. ‘솔리드 옴므’라는 이름도 다른 색깔이 섞이지 않았다는 뜻의 영어 단어(solid)에서 따왔다. 이름처럼 무채색 옷을 섬세하게 바느질한 옷을 내놨다. 이문세·이승철·신승훈·이승환·윤상 같은 발라드 가수가 앞다퉈 그를 찾기 시작했다. 배우 박중훈·신현준 등도 수시로 가게를 찾아왔다. 우영미는 “옷 만드는 건 즐거웠지만 연예인이 많이 오는 건 조금 힘들었다”고 했다.

―왜 힘들죠.

“성격상 그들과 말을 잘 못 섞었으니까요. 단골이라고 자주 오니 살갑게 인사하고 농담도 주고받을 줄 알아야 하는데, 워낙 그런 걸 잘 못하거든요. 그런 저를 보고 하루는 박중훈씨가 ‘왜 여기 연예인들이 계속 오는지 알아요?’ 해요. ‘옷이 좋아서 그런 것 아니냐’고 했더니 웃으면서 ‘그것도 맞는데, 선생님이 우리가 하는 말을 잘 듣지도 않고 금방 잊어버리잖아요. 그래서 말이 새어나갈 걱정이 없어서 그래요’ 하더라고요(웃음).”

백화점에 입점했고 매장은 금세 30여 개로 불어났다. 2002년부터는 ‘우영미’라는 이름을 내걸고 해외 진출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이 해외에서 쇼만 하고 돌아와 국내에서 옷을 팔던 것과 달리, 우영미는 파리 본사에 직접 법인을 만들고 유럽 바이어를 대상으로 옷을 팔았다. 2011년에는 우리나라 디자이너 최초로 프랑스 파리 의상조합 정회원이 됐다. 정회원이 되려면 파리에서 꾸준히 활동해야만 하고, 프랑스 패션 안팎 전문가로부터 검증을 거치는 것은 물론, 여러 브랜드 디자이너에게 추천을 받아야만 한다. 우영미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다 피가 나는 나날이었다”고 했다.

―처음엔 파리 호텔방에서 재봉틀을 돌렸다면서요.

“말도 마세요. 쇼 당일 다리미 하나 제대로 빌릴 데가 없어서 발 동동 구르고 그랬어요(웃음). 변변한 에이전트 하나 알지 못했으니까요. 쇼만 해선 안 되고 파리 편집매장에 내 옷을 걸고 바이어에게 상품을 팔아야 하는데, 누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디자이너 옷을 받아줘요. 3년쯤 매일같이 거절당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한 유명 편집매장 매니저가 그러더라고요. ‘너는 그래도 좀 다르구나?’ 파리에서 쇼를 하는 디자이너가 한둘이 아니지만, 계속 꾸준히 하는 디자이너는 없다는 거죠. 게다가 모르는 나라에서 온 디자이너니 그냥은 못 믿는다는 거죠. 얘가 꾸준히 버티는지 한참 지켜보고 나서야 받아준 거예요.”

2006년 프랑스 봉마르셰 백화점에 입점했고 같은 해 파리 마레 지역에 단독 매장을 냈다. 동생 우장희는 봉마르셰에 입점하는 날 우영미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니,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진짜 맞지?” 당시 우영미는 그를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했다. “너 없으면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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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일곱 살 우영미가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속 선글라스를 끼고 선 소녀가 우영미, 선글라스를 끼고 개와 함께 선 사람이 아버지다. 사진 속 어머니는 막냇동생을 임신 중이다. (오른쪽) 우영미와 그의 동생 故 우장희 전무〈사진 오른쪽〉가 이야기 나누는 모습. 두 사람은 25년 동안 서로를 가장 깊이 이해하는 동료였다. /우영미 제공
쌀독 비어도 꽃 사던 아버지

우영미는 1남4녀, 다섯 남매 중 둘째 딸이다. 큰 언니 우경미와 셋째 동생 우현미는 지금 함께 공간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남매 대부분이 예술 계통 일을 하는 셈이다. 우영미는 “이게 다 아버지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남다른 아버지였던 모양입니다.

“철이 없어도 너무 없으셨죠(웃음). 경북 영주에서 유복하게 자랐고 일본 유학 다녀온 이후엔 미군 부대에서 일을 받아 건물을 짓는 일을 했어요. 인스턴트 커피도 희귀하던 시절에 아버지는 매일 아침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려 마셨어요. 남들은 저희가 엄청난 부자인 줄 알았지만, 사실 우리 집엔 쌀 한 톨 없을 때가 많았죠(웃음).”

저축이라고는 모르는 아버지였다. 돈을 많이 벌 땐 대궐 같은 삼층집에 살던 때도 있었지만, 금세 빚쟁이에게 몰려 내쫓기기 일쑤였다.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보그’ ‘마리끌레르’ 같은 외국 잡지를 쌓아놓고 읽었고, 매일 꽃을 사다 화병 가득 꽂아두었다. 옷장을 열면 아버지 옷이 한 가득이었다. 로브 가운부터 트렌치코트까지…. 영화에나 나올 법한 연둣빛 클래식 자동차를 몰고 다니기도 했다. 우영미는 “그 자동차로 학교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하는 날이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고 했다.

―왜죠?

“중고로 산 차였는데 겉보기만 근사할 뿐 보통 낡은 게 아니었어요. 걸핏하면 멈춰섰거든요. 나는 나름대로 학교에서 공부 좀 한다고 도도하게 고개 들고 다니는 아이였어요. 아버지랑 그런 차를 타고 학교에 가면 다들 구경 나올 거 아녜요. 그런데 그때 아이들 앞에서 차가 멈춰 서기라도 하면 웬 망신이겠어요. ‘아버지, 제발 걸어가게 해주세요’ 했죠(웃음).”

한번은 아버지가 직접 집을 지었다. 집은 따뜻하고 편해야 하지만, 아버지는 제멋대로 특이하게 짓고 싶어했다. 결국 집은 오각형 모양이 됐다. 바람이라도 불면 지붕이 덜컹거렸다. 네 딸은 그 집에서 다 같이 누워 뒤척이며 이런 다짐을 했다고 했다. ‘절대로 아버지 같은 남자와 살지는 않겠다’고. 우영미는 “다들 결국 정말 평범한 남자를 골라 결혼했다”면서 “참 오랫동안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하고 또 미워했다”고 했다.

―지금도 미운가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죠. 아버지의 그 허세와 무절제 덕에 우린 돈이 그렇게도 없으면서 값비싼 그릇에 밥을 나눠 먹었고, 옷 하나를 지어 입어도 남다르게 입었어요. 그땐 그토록 아버지가 싫었지만, 그 덕에 우리 남매 모두 진짜 멋있고 근사한 게 뭔지 몸으로 익혔죠.”

아버지는 치매를 앓다 2014년 눈을 감았다. 말년의 그는 시력을 거의 잃고 앞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숨지기 직전까지 영국 빈티지 찻잔에만 커피를 담아 마셨고 큰딸이 무심코 둘러준 고급 머플러를 만지며 “이건 진짜 좋은 거네”라고 중얼거렸다고 했다. 아버지 발인을 하던 날, 다섯 남매는 아버지 관에 그 머플러를 넣어 드렸다. 우영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사는 게 참 재밌죠. 저는 지금 그런 아버지를 닮은 남자를 생각하며 옷을 만드니까요. 디자인을 할 때마다 그 젊은 시절의 아버지가 떠올라요. 그때마다 심장 어딘가가 아릿하게 아프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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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파리 마레 지역에 들어선 ‘우영미’ 단독 매장을 보러 온 외신 기자들과 함께. ‘우영미’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최고급 남성복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 우영미 제공

그래도 닮는다

2014년 우영미는 큰딸 정유경(29)을 ‘우영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앉힌다. 큰딸 정유경은 전화통화에서 “어릴 때부터 엄마가 일하는 사무실에서 원단을 만지고 미싱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늘 일하는 엄마가 야속해서 ‘나는 결혼하면 워킹맘 같은 건 절대로 안 할 거다’라고 말했는데, 막상 결혼 후 임신해서 만삭인데도 꾸역꾸역 일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봤다(웃음). 보고 배운 게 참으로 무섭다는 걸 새삼 알았다”고 했다.

―얼마나 지독하게 일했길래 딸이 ‘워킹맘은 싫다’고 했던 건가요.

“아이 낳기 일주일 전에도 비행기 타고 출장을 다녔어요(웃음). 항공사에서 만삭 임산부는 그냥은 못 태운다고 해서 의사 진단서에 사인까지 받아서 갔죠. 저는 천재는 아니지만, 기왕 시작한 일은 끙끙대면서 어떻게든 해야 하는 사람이었어요. 딸도 그걸 보면서 은연중 닮아가고 있는 거겠죠.”

―딸이랑 일하는 것이 쉽진 않을 텐데요.

“왜 아니겠어요(웃음). 하나부터 열까지 부딪혀요. 날마다 수행하는 기분으로 작업하죠. 그런데 자꾸 싸우면서 문득 깨달아요. 이 아이가 동생 장희랑 많이 닮았다는 걸요. 하고 싶은 말을 서슴없이 하고 표현이 늘 거침없죠. 디자이너는 혼자 일하면 안 돼요. 늘 다른 누군가와 소통하면서 껍질을 벗고 배워야 하죠. 나와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부딪히다 보면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알 수 있어요. 장희가 오랫동안 나란 사람을 비춰주는 거울이었듯, 지금은 딸이 그런 존재가 되는 거겠죠.”

우영미는 요즘 시간이 날 때면 108배를 하고 금강경을 읽는다. 그는 “내가 누군지를 제대로 알기 위해 홀로 침잠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깨달았습니까.

우영미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그래도 계속 꾸는 사람이요. 처음엔 단색 옷감이 좋아서 ‘솔리드’라고 이름 붙였지만, 돌아보니 어느덧 그 단어는 ‘단단하다’는 뜻의 말이 된 것 같아요. 누가 뭐래도 꿋꿋이, 홈쇼핑 안 하고 대기업에 내 브랜드 안 팔고, 이만큼 왔으니 그만큼 단단해지기도 했겠죠.”

―훗날 동생을 만나면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우영미는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너에게 ‘언니 그것밖에 못 했어?’라는 말 안 들으려고 버텼다’고요. ‘잘 해’그 한마디 때문에 이만큼 달려왔다고요.” 그의 콧날이 다시 붉게 물들었다. 찻잔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단단한 눈물방울이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01/201709010213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