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5.05 03:10
[공포증 치료법으로 뜬 가상현실]
신년사 발표 두려웠던 CEO도 대인 기피 고위 공무원도 찾아
의대생들은 해부·수술 연습, 특전사도 고소공포증 치료 문의
- 본지 기자 '면접 시험' 직접 체험
기기 쓰자 가상 면접관이 눈앞에 "이 일에 당신이 적합한 이유는?"
머뭇거리며 "글쓰기 좋아해서…"
"당신의 눈맞춤 점수는 53%… 공포 줄이려면 더 연습해야" 진단
지난 2일 서울 강남세브란스병원 3층 가상현실(VR) 클리닉. VR 기기를 머리에 쓰고 의자에 앉자 눈앞에 입사·승진 면접 상황이 펼쳐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옆 자리엔 면접 지원자들이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앉아 있고, 정면에는 면접관 세 명이 있었다. 모두 가상(假想)의 인물들이다. 면접관이 기자에게 질문을 잇달아 던졌다. "지원자의 강점과 약점은 무엇이지요?" "이 일에 왜 자신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나요?" 예기치 못한 질문에 당황해 "글쓰기를 좋아해서…"라며 간신히 답을 이었다. 면접관과 눈맞춤 점수 53%에, 답변 시간과 맥박수 등이 주르륵 자동으로 채점돼 '면접 공포를 줄이려면 더 연습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중견기업 CEO도, 특전사도…
가상현실을 활용해 공포증을 누그러뜨리는 새로운 치료법이 등장했다. 대인(對人)공포증이나 고소공포증 등을 가진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VR 콘텐츠를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VR 클리닉을 찾는 환자는 다양하다. 직원들 앞에서 '신년사' 발표조차 못 하던 중견기업 CEO, 교회에서 대표기도 하기를 겁내던 60대 어르신, 사람 만나기를 어려워하던 고위 공무원 등이 치료를 받았다. 이 병원 관계자는 "지난달엔 특전사에서 고소공포증 극복을 위한 VR 기기 활용법을 문의했다"고 말했다.
VR 기술은 현실이 아닌데도 진짜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이용한 공포증 치료는 공포 상황에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해 이를 극복하도록 하는 훈련이다. 국내 VR 치료 연구의 선두 주자로 꼽히는 김재진 강남세브란스병원 교수(정신건강의학과)는 "2000년대 초반 조현병 환자 치료 등을 위해 처음 개발된 VR 치료가 최근에는 스마트폰과 VR 기기 등과 접목해 언제, 어디에서든 손쉽게 VR 치료가 가능하도록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의 체험 코스엔 고소공포증 극복 프로그램도 있었다. 휴대용 VR 기기를 썼더니 깊은 골짜기 사이에 놓인 구름다리를 건너고, 사방이 탁 트인 엘리베이터를 타고 초고층 건물 옥상으로 속도감 있게 오르는 가상현실이 펼쳐졌다. 마치 놀이기구를 탄 듯 가슴이 저절로 오그라들었다.
VR 치료 효과는 뚜렷하다는 게 이 병원의 설명이다. 김 교수는 "공포증 극복 임상실험에 참여한 남녀 82명을 상대로 맥박수 측정 등을 통해 효과를 분석한 결과, 고소 공포 대상자의 87.5%, 발표 공포 대상자의 88.1%에서 공포감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다른 의료기관들도 VR 활용에 속속 나서고 있다. 분당차병원에서는 VR을 재활 의학 연구에 활용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가상의 공간에서 팔다리를 움직이는 연습을 해보도록 하는 식이다. 분당서울대병원은 지난 2015년 신규 의료진이나 의과대학생 교육에 VR을 도입했다. 외과 대장암 수술을 VR 교육 콘텐츠로 제작해 눈앞에서 수술 장면을 보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이다.
◇"무궁무진한 활용처"
외국에서도 의료계의 VR 활용이 늘고 있다. 미국에선 이라크 참전 군인 등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극복 치료에 VR을 활용했다. 미국 남가주대(USC) 연구팀은 이라크 전투 장면을 재현한 '버추얼 이라크(Virtual Iraq)' 프로그램을 개발해 귀환병들의 심리를 치료했다. 일본에선 암 환자들이 항암제 치료를 받을 때 오심·구토 등 부작용을 줄일 수 있도록 항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