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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萬人義塚에 萬人은 없었다

최만섭 2017. 5. 3. 09:03

[박종인의 땅의 歷史] 萬人義塚에 萬人은 없었다

입력 : 2017.05.03 03:02

[79] 남원 만인의총의 비밀과 아기장군 아지발도

정유재란 개전 후 첫 전투… 남원성에서 6만 일본군 맞아 1만 조선 군-민 전원 전사
비겁한 명나라 장수 양원은 전투 중 도주했다가 본국 송환돼 참수형
조선으로 양원 머리 보내자 왕실 "제사를 올려주라"
만인의총은 해방 뒤 붙인 이름… 조선시대에는 벼슬아치들만 제사
권력에 대한 불신은 '왜구 아지발도는 민란 두령 아기장수' 전설 만들어

박종인의 땅의 歷史
역사 교과서에서 이리 배웠다. '정유재란이 벌어진 1597년 추석 무렵 남원성을 공격한 일본 6만 대군에 맞서 싸우던 백성과 의병, 관군 1만 명이 전멸했다. 추석을 하루 넘긴 날이었다. 전후 전사자들을 합장했다. 이를 만인의총(萬人義塚)이라 한다.'

결론부터. 만인의총에 만인(萬人)은 없었다. 남원 만인의총 앞 사당 충렬사는 만인이 아니라 전투 수뇌부 8인을 위한 사당이었다. 사당에 '순절만인(殉節萬人)' 위패가 모셔진 때는 해방이 되고도 28년이 지난 1973년이었다. 게다가 지금 만인의총은 묻힌 이 하나 없는 허묘(虛墓)다. 의로운 죽음에도 계급이 있는가? 420년 전으로 떠나본다.

1597년 한가위, 남원성

임진왜란 말 명과 일본 사이 휴전협상이 결렬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대한 재공격을 명령했다. 그 전쟁에서 육지에서 벌어진 첫 전투가 남원성 전투였다. 일본에 유리한 조건으로 종전(終戰)을 하려면 기필코 남원을 점령하고 호남을 차지한 뒤 한양까지 진격해야 했다. 이 같은 사실을 조선도 알고 있기에 조선군은 남원에 있는 교룡산성에 요새를 구축하고 대비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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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개전 초기인 1597년 추석 전라도 남원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6만 명에 이르는 일본군을 상대로 남원성 백성과 군사 1만이 싸워 전멸했다. 그들을 기리는 곳이 만인의총이다. 그러나 조선왕실은 이 의로운‘만인(萬人)’에 대해서는 무심하고 무관심했다. /박종인 기자
남원 조선군과 합류한 명나라 사령관 이름은 양원(楊元)이었다. 부임 첫날 그가 말했다. "그대 나라 사람들은 흐리멍덩하고 겁이 많으니 적을 보고 붕괴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爾國之人鬆且怯 若臨敵潰散則將奈何)?"(선조 30년 8월 6일자 실록) 기병 출신인 양원은 연합군 사령부를 들판에 있는 남원성으로 옮겼다.

요새를 포기했으니 전투는 불문가지였다. 한가위를 이틀 앞두고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를 선봉으로 한 일본 육군 6만 대군이 남원성 사방을 포위했다. 명나라 부대가 지키고 있던 동, 서, 남문이 뚫렸다. 조선군과 백성들은 북문 쪽으로 쫓겨 들어갔다. 전황을 눈치 보던 양원이 졸개들과 남원성을 빠져나갔다.

전북 남원
6만 대 1만. 북문 쪽으로 몰린 조선인은 전멸했다. 관군 4000명에 의병과 민간인 6000명, 도합 1만 명이 학살당했다. 일본군 군승 게이넨(慶念)은 이렇게 기록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쳐 죽여서 생포할 놈은 한 사람도 없구나.'(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

도주했던 명나라 장수 양원은 본국으로 송환돼 참수당했다. 명나라 정부는 구경거리로 삼으라고 잘린 양원의 머리(斬頭·참두)를 조선으로 보냈다. 그런데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을 듯하다고 아뢰니, (선조 임금이)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선조 31년 10월 8일자) 바보였거나 제정신이 아니었거나 둘 중 하나다.

사흘 만에 남원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호남을 집어삼키고 기세등등하게 북진하다가 이순신에게 황당한 일격을 당했다. 열세 척으로 150척을 무찌른, 이순신조차도 '하늘이 도왔다(天運)'라고 평가한 명량대첩이다.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전주성에 입성했지만, 일본군은 충청도 직산에서 북상을 멈춰야 했다. 1만 남원 의민(義民)들이 일본군을 사흘 동안 지체시키지 않았다면 달리 돌아갔을지도 모를 전황이었다.

만인의총(萬人義塚) 전말사

만인의총 앞 충렬사에 있는‘만인’의 위패.
만인의총 앞 충렬사에 있는‘만인’의 위패.
전투가 끝나고 성문 밖에 시체들이 겹겹이 쌓였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시신들을 북문 밖 물구덩이에 집어넣었다. 그 위에 봉분 하나를 만들어 표시를 해두었다. 아직 더운 가을이었다. 합당한 예법에 따라 장례할 방법이 없었다.

1612년 지역 유림(儒林)이 순절자들을 위한 사당을 세웠다. 1653년 왕실에서 '충렬사(忠烈祠)'라는 이름을 내렸다. 이곳에 모신 순국자들은 일곱 명이었다. 만 명이 아니라 일곱 명, 훗날 한 명이 추가돼 여덟 명이었다. 1940년대까지 만인이 묻힌 자리 또한 팔충신묘(八忠臣墓)라 불렀다. 일제 강점기 1만 의인을 합장했던 물구덩이에 주택가가 들어섰다. 주택가 옆으로 철로가 나고 남원역이 섰다. 질퍽질퍽한 물구덩이는 증기기관차가 뱉어내는 석탄 찌꺼기 처리장으로 사용됐다.

해방이 되고 4년 뒤 남원국민학교 교장 이기원을 필두로 뜻있는 사람들이 남원역 앞 봉분에 상석을 놓고 주변에 담장을 치고서 제사를 지냈다. '만인(萬人)'이라는 이름으로 치러진 첫 제사였다. 그리고 1964년 3월 14일 왕봉산 기슭, 지금 자리에 의인들을 이장했다. 충렬사도 함께 이건됐다. 그리고 1973년 충렬사 제단 정중앙에 '만인(萬人)'의 위패가 들어섰으니 1만 의민이 순절하고 376년 만의 일이었다. 왕조 시대 희생된 사람들이 20세기 대한민국 공화정 시대에야 대접을 받게 된 일대 사건이었다.

충렬사에 제사를 지내오던 유림 측은 위패 위치와 제사 방법을 놓고 당국과 갈등을 빚다가 1981년 별도로 충렬사를 만들었다. 2017년 5월 현재 남원에는 충렬사가 두 개 있다. 만인의 충렬사, 그리고 유림의 충렬사.

석탄재만 쏟아진 만인의총

한병옥(74)은 전직 교사다. 지금은 사학자다. 남원역 폐역사 한쪽에서 남원성 북문터를 발굴한 사람이다. 남원을 휩쓴 동학 그리고 정유재란의 흔적 또한 한병옥의 마음을 옥죄는 기억들이다. 그가 말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만인을 함께 모신 적이 없었다. 한마음 한뜻으로 싸우다 함께 죽은 영령들인데 벼슬아치라고 추앙받고 무명인이라 하여 귀신 취급도 받지 못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조사해보니 현실이 그랬다." 회한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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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남원역 앞에 있는 옛 만인의총 터(가운데 흰 담장). 1960년대 이장시 석탄재가 쏟아졌다.
"왕봉산으로 이장할 때 아무리 옛 의총 터를 파들어가도 석탄재에 연탄재밖에 나오지 않았다. 결국 뼛조각 하나 수습하지 못하고 흙만 퍼서 이장했다. 백골이 진토(塵土)가 되기에는 세월이 너무 짧다. 옛 만인의총 터 깊은 곳에 의인들이 굉장히 많이, 아주 넓은 면적으로 잠들어 있다는 말이다." 정신적·종교적으로는 왕봉산 양지바른 기슭에서 그들이 쉬고 있을지 모르나 물리적으로 만인의총은 여전히 420년째 옛 물구덩이에 있다. 여기까지가 만인의총 전말사다.

황산대첩과 이성계

1380년 고려의 신흥 권력자 이성계는 지리산에 숨어든 왜구들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운봉 땅 황산에서 벌어진 이 전투를 황산대첩이라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 사람들은 그 왜구의 우두머리를 아지발도(阿只拔都)라고 불렀다. '아지'는 '어린'이라는 뜻이고 '발도'는 몽골어로 '장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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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0년 황산대첩 때 아지발도가 흘린 피가 남은 남천 피바위.
'아지발도는 나이 15세가량에 얼굴이 단정하고 고우며 빠르고 날래기가 비할 데 없었다.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며 달려와 부딪치고 가는 곳마다 쫓기고 쓰러져서 감히 당해낼 자가 없었다.'(고려사절요) 이성계가 그 무용(武勇)을 아껴서 생포하려고 했으나 부하들의 만류에 화살로 쏘아 죽였다. 아지발도가 흘린 피가 남원 남천변 바위를 물들여 이를 피바위라고 했다. 지금도 남아 있다. 전투가 어찌나 격렬하고 길었던지 지는 달을 끌어당겨 놓고 싸웠다고 해서 황산 아래 마을 이름은 인월(引月)이다. 남천은 피가 넘쳐 일주일 동안 마시지 못할 정도였다.

훗날 대첩을 기리는 비석이 황산 아래 섰다. 일제 강점기 비석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됐다. 지금은 그 조각난 비석을 눕혀 놓은 파비각(破碑閣)과 중건한 비각이 서 있다.

아기 장수와 아지발도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이성계가 죽인 사람이 왜구 두목이 아니라 민란을 지휘하는 아기 장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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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광한루에서 펼쳐지는 평화로운 남원 춘향제.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아기가 태어났는데, 부모가 날개를 잘라버렸지만 용맹하게 자라났다. 훗날 반란을 두려워한 권력자가 관군을 보내 장수로 성장한 아기를 죽여 버렸다.' 전국 팔도에 떠도는 아기 장수 전설이다. 지리산 주변 남원과 구례, 함양 땅에도 똑같은 아기 장수 전설이 있다. '우투리 설화'다. 그런데 지리산 우투리 설화에서 그 아기 장수를 죽인 사람이 바로 아지발도를 죽인 이성계다.

황산대첩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이성계가 새 왕조를 열었다. "이후 조선 왕조에 부패와 실정(失政)이 쌓여가며 지리산 주변 민초들에게 각인된 이성계라는 인물이 권력, 관군의 상징으로 정착됐다."(전 부산대학교 한국
민족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정연현) 여기에 이성계에 의해 죽은 왜장 아지발도가 아기 장수로 정착돼 지금까지 전래됐다는 것이다.

만인이 없는 만인의총, 이성계에 대한 원망, 왜구 두목 아지발도에 대한 동정심과 아기 장수의 죽음. 무엇을 말하는가. 백성이 주인이고, 주인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이다. 남원 땅에서 그 대한민국을 본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03/201705030007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