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최만섭 2016. 2. 8. 16:46

 



작성자: 최만섭     2007-10-16 12:32:04  

                                                       제목 : 가을


가을 한기(寒氣)가 엄동설한(嚴冬雪寒) 보다도 춥게 느껴지는 것은

그 가을이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 맑은 하늘에 살기 때문이다.

나는 금강산 초록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려주어

가파른 상팔담을 무사히 오를 수 있었다. 

자연은 이렇게 내게 하늘과 공간(空間)을 일러 주었다.


7호선 도봉산 역 유리창에는 인간의 눈에서 가슴으로

일방 통행하는 살가운 가을이 살고 있다.

지나가던 짓궂은 나그네가 수천 평 대지에 이부자리를 펼친

해바라기와 코스모스와 국화를 흔들어 깨우면

그들은 일제히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장엄하게 합창을

하면서 어깨춤을 춘다.


나는 양털 구름처럼 흐르는 물결 속,

거미줄같이 희고 가는 파장 끝에 위태롭게 매달린 윤회(輪廻)를 발견했다.

무아(無我)는 너무나 건조하고 영혼(靈魂)은 너무나 기름지다.


검은 망토를 걸친 구름이 어둠과 물줄기를 동시에 떨어뜨리자

지나가던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해바라기 밭으로 달려가

소피아 로렌의 노란 가슴을 풀어헤친다.

나는 텅 빈 역사에서 시심(詩心)을 빼앗긴 시인(詩人)이

이탈리아 여인의 탐스러운 허벅지를 훔치는 현장을 목격했다.


발심(發心)을 잃고 의식(意識) 마저 빼앗긴 나는

그 무력함과 무의식에서 벗어나고자

가을비 속에 통곡하는 노승(老僧)을 찾았다.

1930년대 경상남도 사천에 가난한 청상과부가 어린애를 키우고 있었다.

방앗간 허드렛일을 하다가 팔 하나를 잃어버린 여인은

먹고 살길이 막막하여 어린 자식을 부처님께 봉양했다.

수계(受戒)를 받기 전날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자 찾아온

아들에게 어머니는 모질게 마음을 다그쳤다.

“스님! 빨리 절로 돌아가소! 앞으로는 절대로 이 어미를 찾지 마세요!”

눈비 새는 초가집에서 자식을 기다린 어머니의 한 많은 세월을

되돌아보다 목이 멘 스님 앞에서 어머니는 부처님 나라로 떠나갔다.


나는 발목까지 차오르는 물줄기를 밟으면서 초록 샘에 얼굴을 파묻었다.

메마른 몸뚱이를 떠나갔던 연민(憐愍)은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열반(涅槃)에

 든 가을에 돌아와 이 세상 만물(萬物)을 흠뻑 적시고 있다.

  

*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주연의 이탈리아 영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멜로물. 끝없이 펼쳐진 우크라이나의 해바라기 밭을 헤매는 소피아 로렌의 모습은 지울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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