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 노조

[데스크에서] 반값 노동자, 귀족 노동자

최만섭 2015. 11. 16. 16:30

[데스크에서] 반값 노동자, 귀족 노동자

입력 : 2015.11.16 03:00

박은호 사회정책부 차장 사진
박은호 사회정책부 차장
말 많은 임금피크제를 긍정의 눈으로 보면 이런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내 밥을 한술 떠내 이웃의 밥그릇에 얹어주는 십시일반의 미덕이다. 내 배는 조금 덜 포만해도 상대방의 굶주림은 면하게 해주자는 것이다. 일자리를 구하려 해도 실업에 허덕이거나 질 낮은 일자리로 내몰려 호구지책을 이어가는 아들딸 세대에게 어른 세대가 자기희생으로 공동체 정신을 구현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니 임금피크제를 수용한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일단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다. 거부하더라도 비난할 건 아니다. 이기주의 자체로는 악덕이 아닐뿐더러 내 밥을 지키겠다는 이기심이야말로 인간의 숙명이자 본능 아닌가.

하지만 뭐든 지나치면 문제가 달라진다. 현대자동차 이경훈 노조위원장은 얼마 전 노조 홈페이지에 "조합원(이 흘린) 땀을 무시하고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 파국임을 사측은 명심해야 한다"고 썼다. 임금피크제를 결사반대하겠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지난 2년 임기 동안 정년 60세, 연월차 수당 150% 및 상여금 확대 같은 성과를 올렸다"고 노조원들에게 알렸다. 평균 연봉 9700만원을 받는 4만8000명 현대차 노조원들은 밥그릇이 더 커졌다며 박수를 쳤겠지만, 그보다 100배 넘는 600만명 미생(未生)들과 130만명 청년 백수들은 '귀족 노조'의 집단 이기심에 속이 터졌을 것이다.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에선 더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작년 이맘때 윤장현 광주시장은 '광주형 일자리 창출' 방안을 발표했다. "연간 62만대인 기아차 공장 생산 능력을 100만대로 키워 청년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찾아주겠다"는 내용이다. 지역 시민단체·노동조합 등과 대타협해 "신규 일자리의 초임 연봉을 3000만~4000만원에 맞추겠다"고도 했다. 고졸 생산직 초임 연봉이 약 7000만원인 현 노조원의 임금 수준으로는 기아차의 투자를 이끌어내기 어렵다고 판단해 "임금을 낮출 테니 투자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기아차 측은 관망 중이지만 광주시민은 여기에 압도적으로 찬성하고 있다.

그런데 기아차 노조의 태도가 기이하다. 애초 "자녀들이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던 입장에서 발을 빼고 있다. 자신들과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연봉은 절반만 받는 '반값 일자리'가 생기면 "생산성이 비교된다" "장기적으로 우리 연봉도 깎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라고 한다. "자동차 수요는 한정돼 있는데 국내 공장을 증설하면 (현 노조원의) 고용이 불안해질 수 있다"는 말도 들린다. 귀족 노동자들이 청년들에게 줄 괜찮은 일자리를 만들 기회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한목소리로 노동시장 개혁을 외친 지 1년을 넘겼다. 16일엔 비정규직법을 비롯한 노동개혁 법안이 국회에 상정되고, 노사정위원회도 곧 노동개혁 방안 최종 의견을 발표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인가. 기아차 노조의 행태를 보면 노동시장 개혁을 한 발짝도 진전시키지 못할 것 같다는 우려를 떨칠 수 없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