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행복(幸福)

최만섭 2015. 9. 29. 20:55





행복(幸福)

 
1. 초심(初心)
몇 일전 회사 후배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고 나는 이십 년 전 가을로 돌아갔다. 나는 사내 체육대회가 열리는 운동장에 내리쬐는 강렬한 햇살을 향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들애를 안은 팔에 힘을 주고 있었다. 내가 그때 그렇게 크게 웃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다음 날 깨어나도 내 인생은 아직 여름이며 내 아들도 오늘과 같이 신기하고 사랑스러워서 누구도 감히 나의 행복을 깰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確信)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와 나는 한쪽 다리를 끈으로 매고 달리면서 약속했었다. `세상(世上)에서 가장 아름다운 회사(會社)를 만들자.`나는 그와 함께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우리는 세상일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아서 마음을 다부지게 다져야 할 필요를 느낄 때나 도덕적(道德的)으로 타락하여 인간(人間)의 본성(本性)이 그리울 때 초심(初心)을 이야기한다. 어느 경우든 초심(初心)의 잣대는 현실(現實)을 바라보는 시각(視角)이다. 현실(現實)에 안주하면서 타락한 세속적인 가치(價値)에 분노(憤怒)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에게 초심(初心)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동화 속에 가련한 할머니가 아름다운 과거 속으로 잠기려 할 때마다 방해꾼이 나타나 추억의 물컵을 떨어뜨리듯이 그는 내가 내민 소주잔을 물리고 사이다 잔을 잡았다. 그리고 아주 엄숙하고 냉정하게 물었다. `선배님, 십 년 후를 생각할 때마다 아찔합니다. 이런 박봉으로는 애들 대학 학비는커녕 목구멍에 풀칠도 못할 겁니다.` 그의 십 년 후는 현재의 나였다. 그는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면서 다단계 판매회사에 등록을 하라고 권유하였다. 그의 매니저는 연 매출액이 20억이 넘고 수당도 2억이 넘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제의(提議)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내게 행복(幸福)은 부자(富者)가 되는 것이 아니라 초심(初心)을 가지고 사는 것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타인(他人)에게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행위(行爲)를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지성인들은 어두(語頭)에 붙여야 할 `내 생각으로는`을 생략하고 마치 자기 의견이 절대적인 진리(眞理)인 것처럼 떠들어 댈 때 행복(幸福)하다고 하며, 소위 돈 있고 백 있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들에게 아무 생각 없이 고함을 질러서 스트레스를 없애면서 행복(幸福)해 한다.  행복(幸福)을 자기 자신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구하는 것은 불선(不善)이며 죄악(罪惡)이다.

행복(幸福)은 초심(初心)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동양의 심성론(心性論)에서는 성(性)의 정의(定義)를 천리(天理)가 인간(人間)과 사물에 품부(稟賦)된 것으로 생각한다. 초심(初心)은 인간(人間)의 본성(本性)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향한 의지(意志)이며 열정(熱情) 이다.

품부(稟賦) : 선천적으로 타고남.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마음가짐, 어짊과 의로움과 예의와 지혜를 말함.

2. 이해(理解)
행복(幸福)하면 연상(聯想)되는 것은 언젠가 결혼식장에서 들은 목사님의 주례사다. 그는 행복한 부부 생활을 위한 덕목(德目)으로 사랑과 이해를 꼽으면서, 부부간에 반목하고 싸우게 되는 주된 이유는 사랑과 이해를 동일시 생각하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사랑과 이해는 별개의 객체(客體)다. 그래서 사랑하는 남녀 간에도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으면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어렵다는 것이다.

몇 일전 모 텔레비전 방송국에 소개된 국립암센터 병원장 `이진수` 박사의 이야기는 내게 `이해하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일깨워 주었다.

땅바닥까지 끌리는 낡아빠진 가운을 걸친 초라한 그의 모습은 의사라기보다는 영화 `도망자`의 `외팔이`를 떠오르게 한다. 그는 참으로 불행(不幸)한 운명(運命)을 타고났다. 그 자신은 얼굴 뼈가 성장하는 희귀한 불치병에 걸린 중환자이며 어머니를 위암, 할머니를 자궁암, 집안 할아버지를 폐암으로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환자뿐만 아니라 환자 가족에게도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암은 죽음이 아니라 더 불어 살 수 있다는 인식(認識)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머리가 하얗게 세는 불치병에 걸린 암환자인데, 다만 이를 인식(認識)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암환자도 정상적인 사람들처럼 삶의 질을 높이도록 노력해야만 됩니다.`

세계적인 암 전문가로 명성을 얻고 최고의 연봉을 받으면서 저명한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그가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을 결심했을 때 동료가 물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십니까? (Are you going back?)` 그는 위트 있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꿈과 희망을 찾아가는 겁니다. (I`m not going back. Going forward.)` 고통받는 암환자에게 세계 최고의 의술과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주는 것은 그의 오랜 소망(所望)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나요?` 그를 인터뷰한 기자의 물음에 그는 진지하게 답했다. `종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신의 부름을 받아서입니다.` 타인(他人)에 대한 진정한 이해(理解)는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苦痛)과 불행(不幸)까지 함께 나눈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신(神)은 고통(苦痛)받는 환자(患者)이며 동시에 그 고통(苦痛)을 치료하는 의사(醫師)인 그를 이 땅으로 보냈는지 모른다.

3. 눈물
나는 습관대로 새벽 산책에 나섰다. 한겨울 강추위보다도 싸늘한 한기가 등 뒤를 강타하고 있었다. 이렇게 삶 자체가 춥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엄마 품을 찾았었다. 모든 추위를 막아 주던 어머니는 이제 이 세상에 안 계신다. 내가 아직 십대였을 때였다. `헤르만 헷세` 을 처음 만난 감격에 행복을 찾아 집을 떠났다가 배고픔과 추위를 못 이겨 집으로 돌아왔다. 싸리 대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자식을 발견(發見)한 어머니는 `이 놈아! 빨리 들어오지 않고 뭐해?`라고 소리치는 대신에 장독대에서 묵은 된장을 뚝배기에 담으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너는 내 속에서 나왔다.` 나는 어머니 품에 안겨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사랑과 지혜(智慧) 사이에서 방황하던 나는 벼랑 끝에서 칠흑 같은 암흑(暗黑)과 마주쳤다. `행복(幸福)이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행복(幸福)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옷을 서로 바꿔 입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행복(幸福)은 운명(運命)이 아니라 선택(選擇)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라고 외치고 싶은 것이다

2002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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