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괴리(乖離)

최만섭 2015. 9. 29. 21:25


작성자 최만섭
작성일 2007-11-23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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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리(乖離)



1. “당신이 의식적으로 김 선생님을 피했다면서요?” 흑백 필름을 되감듯이 집사람이 재빠르게 흘리는 소리는 나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생소한 상황에 직면하여 과거의 불행했던 사건이 현실로 재현되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길함이었다.

가끔 실제로는 체험한 일이 없는 현재의 상황이나 주변의 환경이 마치 이전에 경험한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처럼 처음 접하지만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을 심리학 용어 "를 `데자부(De ja vu) 현상"이라고 한다지만 실패에 익숙한 내게 데자부(De ja vu)는 결코 부딪치고 싶지 않은 `머피의 법칙`일 뿐이다.

"머피의 법칙- 자신이 바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우연히도 나쁜 방향으로만 일이 전개될 때 쓰는 말."

가방에 시집과 영자신문을 챙겨 전철에서 읽는 것이 유일한 취미인 내가 출퇴근 길에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달가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왜 그가 그런 말을 했나?`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파트 정문 앞 마을버스 정류장을 지나면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시내버스 정류장에서는 마을버스도 정차를 하기 때문에 우리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린다. 그는 시내버스 정거장에서 차를 탈 때마다, 마을버스만을 이용하는 나를 목격하고는 자신이 애주가이기 때문에 내가 자신을 피한다고 오해를 한 것 같다.

그와 나는 대입 수험생을 둔 고 삼 아버지이었다. 중등학교 선생님인 그와는 교육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우리 애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이제부터 너에게 정신적 및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라고 약속했다. 우리 애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한 달여 다니던 사설학원을 때려치웠고 학교에서 삼 학년 학생들에게 실시한는 보충 수업도 거부했다. 그는 오후 5시 정도에 귀가하여 독서에만 몰두하였다.

이 세상에 자식의 이런 행동에 속 편할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은 입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만이 창조적 사고가 싹틀 수 있으며, 대학 입시 공부는 선택적인 문제지 필수적인 문제는 아니다. 우리나라 교육의 우선 과제는 단순한 지식인을 양산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해서 진리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뇌하는 지성인을 양성하는 것이다."

그는 나의 이러한 견해에는 찬성하지만 그것은 이상 일뿐 현실성이 없다고 하였다. 우리는 항상 등을 대고 각자 자기 이야기를 해대고는 헤어졌다. 우리의 껄끄러운 관계는 그가 서예로 국전에 입선했을 때 내가 축하인사를 함으로서 말끔히 해소되었다. 그는 나에게 누차 강조했다. “내가 술만 마신 것은 아니오.”

2. 노인의 마음은 어린애같이 여려서 가족이 그들의 진심을 외면할 때 느끼는 상실감을 감당하지 못한다.

나의 가난한 초등학교 동창은 차남이면서도 팔순 노부를 정성껏 모시는 효자다. 대학 다니는 아들애와 고등학생인 딸애 학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부부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생업에 매달려야 한다. 아버지는 항상 불평을 하신다. “몸이 아파 죽겠어. 병원에 데려다 줘?” 몇 차례 진찰을 받았지만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부부는 왜 꾀병을 부리시냐며 면박을 주곤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버님은 자식들이 당신을 휠체어에 태워 당신이 거들던 논밭을 보여 주고 떠들썩한 시장거리에서 막걸리 한 사발을 받아 드리면서 옛날에 당신이 얼마나 자식들을 사랑했었는지를 이야기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자식들! 아비 맴을 그렇게 몰라?” 이럴 때 어르신들이 느끼는 감정은 서러움 일 것이다.

나는 십수 년째 새벽 운동을 나간다. 집사람에게서 집 근처 헬스클럽에 등록하면 될 것을 왜 그렇게 사서 고생을 하느냐는 핀잔을 들을 때마다, 신문에서 읽은 화가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매일 술에 쩔어사는  남편에게 부인은 냉장고에 술병이 가득한데 왜 밖에서 술을 마시느냐고 물었다. 그 화가가 마신 것은 술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도 타서 들었을 것이다. 나는 육체적 건강만을 위해서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잠에서 깨어나는 자연을 맞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시작이고 희망이다.

3. 삶의 현장에서 내가 정말 안타깝게 느끼는 것은 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 속에 내재하여 있는 모순이다. 우리는 흔히 자기와 다른 관점을 `다르다.`라고 하지 않고 `나쁘다.`라고 주장한다.  

타성에 젖은 기성세대들은 젊은이에게 이러한 그릇된 가치)에 순종할 것을 강조하면서 이야기한다. `참을 인(忍)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 그러나 이 말은 간디의 무저항주의를 `불의(不義)와 모순(矛盾)에 대한 저항을 하지 말라`라는 뜻으로 잘못 해석하는 것과 같다. 간디는 비폭력적이고 평화적 방법으로 저항한 것이지 저항 자체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인도의 독립을 위해서, 아름다운 삶을 위해서 제국주의와 우월주의(에 처절하게 맞서다가 산화한 성인이다.

4. 나는 불면과 갈등의 밤을 지새우고 나서 찾아오는 아름다운 언어의 유혹을 뿌리치고자 한다. 자연이 던진 낙엽이 눈썹에 부딪히는 충격을 맛보고 싶은 것이다. 또한 괴리(乖離)와 같은 정신적 고통을 육체적 정화와 움직임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지루한 싸움은 내가 일생동안 업고 가야할 업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인생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사는 인간이라면 이런 업보도 사랑해야 할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젖는다.

2002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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