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고향(故鄕)

최만섭 2015. 9. 29. 20:44

작성자최만섭
작성일2007-11-2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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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故鄕)        


마을 입구에 들어서서 길가에 붙은 산자락을 따라 올라가 뒤뜰 장독대처럼 가지런히 자리를 잡은 선묘에 넙죽 엎드려 문안 인사를 드린 후에 두서너 채의 초가집을 지나면 몸배 바지 입은 아주머니가 옷자락을 잡으면서, “도련님! 이제 오십니까? 식사 안 하셨지요? 우리 집에 들어가십시다.”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연상되는 이 장면을 그리면서 내가 늘 가지는 의문점은 `과연 서울 사람들에게도 고향은 존재하는가?`이었다.

사회와 가정에서 차쯤 소외되어가는 나 같은 중년이나 노인들에게 고향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인간적인 따스함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지난 시제에도 고향을 찾았다. 우리나라 모임이 그렇듯이 시제에 모인 사람들은 두 줄로 갈라섰다. 선산을 팔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묘를 한 곳으로 모아 종중묘지를 조성하자는 이야기였는데 싸움의 발단은 땅을 누구에게 파냐는 문제였다. 그 문제는 돈과 연관된 것이 분명했다. 속내 드러내지 않기 싸움은 몇 시간이 지나도 그칠 줄 몰랐다. 나는 포커페이스 게임을 거부했다. 길가 산등성이에 버려진 가축 배설물이 거북이 등같이 쪼개져 정강이에 난 상처가 아물 때 생긴 검은 딱지같이 속을 매스껍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 이곳 사람들은 고향이 오염되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일손이 달려도 두레나 품앗이를 원하지 않는다. 더불어 사는 삶보다는 각자 사는 것에 익숙해진 것이다.

40여 년 전에 어머니와 나는 육이오 전쟁 이후 처음으로 출입이 허가된 비무장지대인 경기도 연천에서 이미 황무지로 변한 옛 집터를 개간하고 있었다. 검게 타 버린 곡식더미를 발견한 어머니는 마치 잃어버린 보물을 되찾은 같이 기뻐하면서 또 다른 과거의 흔적을 찾아 정신없이 삽질을 해댔다. 어머니는 들일을 할 때 끼니를 잊을 만큼 땅에 매려 된다.

병든 어머니와 무능한 아버지 그리고 네 동생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사 대 독자면서 전주 최씨 종손인 아버지에게 시집을 왔다. 할아버지는 늘 몸 져 누워 있던 아버지보다는 건강하고 악착같은 어머니에게 집안의 대소사를 다 맡기셨다. 그리고 늘 칭찬을 하셨다. “너는 최 씨 집안 최고의 맏며느리야!” 약 7천 평 정도의 논농사를 짓는 비교적 부농이었던 할아버지는 끼니를 거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자 사랑채를 내놓으셨다. 늘 배를 주려야 했던 어머니에게 결혼과 함께 바뀐 환경은 삼신할머니가 주신 최고의 선물이었다. 학교 문턱에도 못 가 본 어머니에게 할아버지는 살아 있는 부처였다.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너의 할아버지는 많은 공덕을 베푸셨다. 할아버지를 본받아야 한다.”

어머니의 꿈과 행복은 육이오 전쟁과 함께 사라졌다. 고향을 잃고 늙은 시어머니와 병든 남편 그리고 사 남매의 생계를 도맡아야 했던 어머니는 거친 여자로서 나머지 생을 살아야 했다. 어머니의 유일한 꿈은 그녀의 땅에서 온종일 흙냄새를 맡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당신이 생전에 그렇게 흠모하던 시아버지 곁에 계신다.

일전에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한 가족의 이야기는 내게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산과 산이 겹친 골짜기 사이로 짙게 깔린 그림자가 엄숙하게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느끼게 하는 강원도 평창에서 노부부가 육 남매를 데리고 살고 있다. 육 남매 모두를 중학교까지만 가르치고 고등학교 과정은 검정고시로 공부를 해서 합격한 형제도 실패한 자매도 있는데, 둘째 아들이 도회지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과년한 두 여동생을 출퇴근시킨다. 둘째는 어둠이 자신의 그림자를 묻어 버린 후에야 여동생 방에 연탄불을 갈아주고 그의 방으로 향한다.

식구들은 함께 모여 농사일을 하는데 큰오빠가 여동생이 쟁기를 끌다가 힘에 부쳐 꼬꾸라지는 모습은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난해한 물음에 대한 단순하고 명료한 답변 같았다. 고향에서 흘리는 땀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행복을 정신적인 것에서 얻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행복은 가벼운 육체가 구름 위를 걷는 것이다.

지난주 일요일 나는 잃어버린 고향의 정취를 찾아 도봉산에 올랐다. 산 정상에는 꿈이 보였다. 검 청색 바위가 구름 위에 떠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산 정상에서 만난 그 바위는 무서운 공룡 같았다.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그 자리에 누웠다. 담쟁이덩굴이 퍼진 유리지붕 밑에서 바라본 푸른 하늘같이 초록 나뭇잎 사이로 조각난 하늘이 보였다. 내게 산이 꿈과 공포로 보였듯이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나 고향도 내가 스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해서 생긴 착시일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직장 동료에게 전화를 했다. 늘 횡설수설하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주제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 나중에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헷갈리게 되기 때문에 회사 동료는 그를 '미친놈'이라고 놀려댄다. 그런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세상만사가 모두 안심이 되는 것은 실수를 저지르고 난 후에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나도 통할만큼 그가 만만해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적당히 지저분한 그의 방은 멍석을 깔아 놓은 고향집 같아서 들일을 마친 후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고 씻지않고 잠에 곯아떨어져도 될 것 같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오 십대 총각인 그는 팔순 노모와 수족을 못 쓰는 지체부자유인 누이와 같이 산다. 직장에서 근무를 마치자마자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가 살아 계시고 누이에게 아무런 변고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는 항상 행복하다. 그렇다! 서울사람이던 뉴욕 사람이던 어머니와 밥상을 마주하는 사람은 고향에서 사는 것이다!

그는 누이를 요양 시설에 보내고 장가를 가라는 동료의 제의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어머니는 친척집에서 허드렛일을 봐주면서 남매를 키웠다. `그 긴 세월동안 그녀는 얼마나 많은 눈칫밥을 눈물에 말아 삼켰을까?` 오소리같이 작은 얼굴 한가운데에 올망졸망 모여있는 이목구비는 늘어진 주름에 묻혔고 곱사 등같이 굽은 허리는 다섯 자도 못 되는 그녀를 더욱 작게 보이게 한다. 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인도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사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untouchable]이 연상된다.

몇 해 전 여름이었다. 나는 전화를 받고 그의 집으로 달려갔다. 플라스틱 챙으로 가린 지붕 난간 아래, 두 개의 연탄아궁이는 흙탕물로 가득 찼고 도랑에서 넘친 거센 물살 속에 지렁이 몇 마리가 쓸려 가고 있었다. 나는 깊은 시름에 잠겨서 언젠가 갑자기 집을 통째로 삼킬 버릴 듯이 쏟아지는 빗줄기가 잦기를 기다리다가 안방에 엎드려 있는 그의 누이를 발견하고는 주저 없이 그녀를 팔에 안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원초적인 기쁨과 환희가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티 없이 맑은 미소는 내가 이 세상에서 받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고향에서 받는 초라한 밥상이다. 내가 그리워하는 고향은 붉은 융단 위에 핀 한 송이 꽃이며 그 꽃의 이름은 고독이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여러분을 이 성찬에 초대하고자 한다.

2002년 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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