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스크랩] 문인이야기-시인 천상병을 회고하며

최만섭 2015. 9. 28. 16:36

 

 

1.시인 천상병 연보 (1930-1993).

# 1930년 1월 19일(양력) 일본 효고(兵庫) 현 히메지(嬉路) 시에서 부(父) 천두용(千斗用)  과 모(母) 김일선(金一善)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출생. 간산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 이년 재학 중 해방을 맞음.
# 1945년 일본에서 귀국, 마산에 정착함.
# 1946년 마산 중학 삼 년에 편입함.
# 1949년 마산 중학 오 년 재학 중 당시 담임교사이던 시인 김춘수의 주선으로 시 [강물]이 <문예>에 추천됨. 추천 시인은 유치환.
# 1950년 미국 통역관으로 6개월간 근무.
# 1951년 전시 중 부산에서 서울 상과 대학 입학. 송영택, 김재섭 등과 함께 동인지 <처녀지>를 발간. <문예>에 평론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를 게재함으로써 평론 활동을 시작함.
# 1952년 시 [갈매기]가 <문예>에 게재되어 추천이 완료됨. 추천 시인은 모윤숙.
# 1954년 서울 상과 대학 수료.
# 1956년 <현대문학>에 [월평] 집필. 이후 외국 서적을 다수 번역하기도 함.
# 1964년 김현옥 부산 시장의 공보 비서로 약 2년간 재직.
#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약 육 개월간 옥고를 치름.
# 1971년 고문 후유증과 심한 음주 때문에 인한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짐. 
                                                                 

2. 행복(幸福).
이 세상(世上)에 낙원[樂園, paradise]이 존재(存在)할까? 나는 지난 주말에 찜질방에 가보고 나서야 아마도 내게는 찜질방이 낙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가마의 뜨거운 열은 내 육체 안에 모든 불순물(不純物)뿐만 아니라 내 마음속에 내재(內在)한 모든 망상(妄想) 까지도 땀구멍 밖으로 내쫓았다.

냉커피로 속을 달래고 나서 신문을 펼쳐들었다. 초록 저고리를 입은 조선 기생 계월향 (桂月香 ?∼1592(?∼선조 25))이 하얀 뭉게구름 위에 앉아 있었다.

계월향 (桂月香): 조선시대 평양의 명기(名妓). 평안도 병마절도사 김응서(金應瑞)의 애첩(愛妾).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소서행장)]의 부장(副長)에게 몸을 더럽히게 되자, 적장을 속여 김응서로 하여금 적장의 목을 베게 한 후 자결하였다.

나는 황토(黃土) 방으로 옮겨서 흙속에 몸을 담고 낮잠을 청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러닝머신 위를 뛰면서 거울에 비친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그들의 얼굴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찾아내려는 나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거울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의 모습만을 비춰준다. 따라서 이곳에 있는 어떤 사람이 행복(幸福)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그가 불행(不幸)한 것이 아니라 행복(幸福)을 인식(認識)하는 기능이 마비된 것이다. 인간(人間)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며 행복이다. 다만, 우리가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장식용 선반 위에 올려놓은 역사의식(歷史意識)과 시심(詩心)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원만 있으면 이곳에서는 충분히 행복(幸福)하다.

불가마같이 뜨거운 인간애(人間愛)를 가슴에 간직한 아름다운 여인, 문순옥 곁에서 일생을 마감한 천상병은 행복한 시인(詩人)이다. 우리가 그의 행복론에 귀를 기울려야 하는 것은 인간(人間)은 누구나 행복(幸福)하게 살고자 존재(存在)하기 때문이다.

제목 : 행 복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느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제목 : 나의 가난은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 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서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웠을 그런 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

시인 천상병은 1967년 여름에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천상병은 친구였던 강빈구 당시 서울대 상대 교수로부터 동독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듣고도 고발하지 않은 혐의 등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가 6개월 동안 갖은 고문과 치욕스러운 문초를 당하고서 선고유예로 풀려났다. 그는 세 차례나 당한 전기고문으로 온전하게 걷지도 못했으며 말도 제대로 못했다. 그는 후유증으로 장기간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 했으며, 그는 이후 거의 폐인에 가까운 기인 생활을 하다가 1993년에 눈을 감았다. 부인 문순옥 씨는 “남편은 풀려나고서 8개월 동안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에 `동백림사건`은 조작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독재정권이 권력을 유지하고자 만들었던 사건에 연루된 시인은 평생을 폐인처럼 살다가 이 세상을 떴다.

그런 폐인 생활을 하는 중에도 그는 시를 썼고, 이 시는 물질적 풍요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지, 절대적인 요인이 아니라는 시인의 삶의 태도가 드러나 있다.

3. 새.
오후 한시가 지나서 나는 옆 건물에 있는 추어탕 집으로 갔다. 나는 습관대로 탕에다 들깨와 다진 풋고추를 한 숟가락 넣은 다음 밥 한 공기를 말았다. 찬 소주가 텅 빈 내장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걸쭉한 국물 한 숟가락을 떠서 겉 조리 김치를 올려 입 안에 넣었다. 나는 입안 가득히 채워지는 포만감에 젖어서 혼미해진 정신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적당히 흐린 날씨는 소주를 당기게 하고, 쌀쌀한 바람은 회색으로 물든 운명(運命)을 나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고독이라고 피하면서도 그 속에 숨은 하얀 미소를 찾아 헤맨다. 행복(幸福)이란 바바리 깃을 세우고 이슬비 오는 오솔길을 걸으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하늘을 나는 새를 바라보는 것이다. 천상병의 새는 천상(天上)과 지상(地上)을 오가는 우체부다.

제목 : 새-아폴로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음악을 듣는 것이다.
내 마음의 빈터에 햇살이 퍼질 때,
슬기로운 그늘도 따라와 있는 것이다.
그늘은 보다 더 짙고 먹음직한 빛일지도 모른다.
새는 지금 어디로 갓을까?
골짜구니를 건너고 있을까?
내 마음 온통 세내어 주고 外國旅行을 하고 있을까?
돌아오라 새여!
날고 노래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 그늘의 외로운 찬란을 착취하기 위하여!

제목 : 새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터에                    
새 날이 와, 새가 울고 꽃이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무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情感)에 가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천상병 시인은 곤궁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 삶을 고통스러워하거나 세상에 대해 원망하지 않는다. 그는 남들이 소중히 여기는 부귀나 영화 같은 세속적 가치를 잊고서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상을 소박하게 살아가고자 할 뿐이다. 그러나 외롭고 고달픈 `영혼의 빈터`에서 사는 그는 자신이 꿈꾸는 `새날`은 `내가 죽는 날, / 그 다음 날`에나 올 것을 예감하며 그때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고 있다. 그때 `살아서 / 좋은 일도 있었다고 / 나쁜 일도 있었다고 /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가 되어 세상의 평화를 고요한 마음으로 응시하며 `낡은 목청을 뽑을 것

이라고` 자신과 약속한다. 이와 같이 죽음으로써 삶을 되돌아보는 방법을 통해 비로소 삶을 아름답게 바라보게 된 시인에게서 우리는 깊은 혜안(慧眼)을 갖은 선승(禪僧)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4. 귀천(歸天).
나는 냉탕으로 들어가 인공 폭포 아래 섰다. 물이 차서 조금은 두려웠지만 쏟아지는 물줄기가 오십 견으로 쑤셔대는 어깨를 사정없이 내리칠 때, 나는 인식(認識)의 부재(不在)에서 해방되는 환희(歡喜)를 만끽했다. 천상병의 시가 이 물줄기 같지 않을까? 그는 말했다. "시를 읽고 짜증을 낸다면 그 시는 가짜입니다! 나는 이런 시는 쓰지 않았다. 되도록 인생의 참뜻을 알리려고 했다."

제목 :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이 시를 읽다 보면 시인의 심성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알게 된다. 본래 천상의 존재였는데 잠시 지상에 소풍 와서 아름다운 아내(문순옥)와 결혼하고 재미있게 놀다가 다시 꿈에서 깨어나듯이 돌아간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 속에는 시인의 우수가 짙게 배어 있다. 그리고 그 어떤 절제의 모습이 그 밑그림을 하고 있다. 죽음을 수용하는 것 같은, 그러면서도 죽음의 고통이나 공포를 초월하는 수용의 자세, 그리고 ‘새벽빛’이나 ‘이슬’(草露人生)처럼 순간적인 인생이라는 허무 같은 것이 이 시의 그림을 이루는 색채라 할 것이다.  

5. 시인(詩人).

나는 천상병 시인의 삶과 시를 접하면서 “당신은 왜 시인(詩人)이 되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시(詩)를 창작하여 이를 중생(衆生)들에게 보시(布施)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각박한 사회에서 시인(詩人)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녹녹한 일은 아니다. “당신은 시를 사랑합니까?”라고 물으면, 정신이 황폐해진 중생(衆生)은 “먹고 살기 바쁜데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요!”라고 비아냥거리고 조소(嘲笑)한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당신은 진정한 시인(詩人)인가?”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에만 몰두한다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망상(妄想) 속에서 헤매게 된다. 물음이 사고(思考)라면 그 답에 대한 집착은 망상(妄想)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또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은 진정한 시인(詩人)인가?” “당신은 정말로 절망(絶望)의 끝에 서서 천상병이 경험(經驗)한 희망(希望)과 행복(幸福)을 보았는가?” 

출처 : 의정부중공업고등학교총동문회
글쓴이 : 최만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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