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터치! 코리아] 다시 김지하를 만난다면

최만섭 2022. 5. 16. 05:18

[터치! 코리아] 다시 김지하를 만난다면

봉달호 편의점주
입력 2022.05.16 03:00
 
 

1991년 5월 18일 전남 보성고 3학년 김철수군이 학교 운동장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했다. 화염 속에서 외친 것은 ‘노태우 정권 퇴진’이었다. 고등학생이 뭘 알아 그랬느냐는 꾸중의 말씀은 잠시 마음에만 담아두셨으면 좋겠다. 당시 나는 김군과 같은 고3으로, 김철수 분신 학생대책위원장을 맡아 김군이 사망하기까지 보름간 집회와 시위를 주도했다.

30년도 지난 일을 다시 꺼낸 것은 엊그제 세상을 떠난 김지하 시인 때문이다. 당시 시인은 조선일보에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다.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라는 부제(副題)로 더 유명한 그 문장을 아침 신문에서 마주했을 때, 나는 ‘내가 아는 그 사람 맞나?’ 싶어 기고자 이름을 거듭 살폈다. 성토하는 대자보도 여러 장 썼던 것 같다. 내용은 잊었지만 대부분 욕설 수준이었을 거다.

시인의 칼럼에 대한 생각이 바뀐 건 남다른 계기가 있어서는 아니다. 그저 살다 보니, 민주화 운동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대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충분히 할 수 있는 충고 아니었을까, 담담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생때같은 젊은이들이 허망하게 목숨을 던지는데, ‘너희 심정은 이해하지만…’이라는 방식으로 다독이는 선배도 있겠지만, 단호히 꾸짖는 선배도 있을 수 있는 법이다. 칼럼 첫 문장 “나는 너스레를 좋아하지 않는다. 잘라 말하겠다”는 태도처럼 말이다. 인생의 아이러니로 나는 군대에 갔다 전투경찰에 차출되어, 학생이 던진 돌덩이에 동료가 죽는 사건 등을 접하며, 방패 너머 입장을 가늠하는 계기도 갖게 되었다.

김지하에게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시인이 문장을 발표한 5월 5일까지 분신한 학생이 3명이었다. 그해 5월 분신으로 목숨을 끊은 시민·학생이 모두 8명. 칼럼이 나간 뒤로도 5명이 더 죽었다. 희생으로 무엇을 이루었나 생각해보면,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던가 하는 회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싸우더라도 살아 싸워야 하지 않았을까. 그해 봄, 동료들에게 애타게 설득한 것도 그것이었건만 하루 건너 한 사람, 죽음의 소식이 들렸다. 5월은 항상 슬펐다.

 

이쪽이 문제지만 저쪽도 문제라서 뒤틀리는 것이 역사인가. 성홍열 같던 1991년 봄의 난장은 시간 가면 숙어질 일이었는데 괜스레 ‘분신을 부추기는 세력이 있다’는 여론을 몰아 이른바 ‘유서 대필’ 사건까지 벌어지는 바람에 역사가 더욱 꼬였다. 자살자의 유서를 동료가 대신 써줬다는 논란은 16년이 지나서야 재조사가 이뤄졌고, 2015년 대법원이 무죄를 확정했다. 사건 당시 수사 검사와 법무장관이 최근까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당시 운동권 학생들은 지금 40~50대 나이가 되었는데도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는 환상을 확신하는 것이다.

시인 생전에 인사동 밤거리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 취기에 난데없이 “선생님, 많이 섭섭했습니다”라고 도발했는데 ‘섭섭’의 내용은 묻지도 않고 나직이 웃기만 하셨다. 뭘 말하는지 아셨던 것 같다. 그런 말을 하도 많이 들었던 것 같고. 그래도 한때는 “젊은 벗들!” 하면서 호통이라도 칠 수 있는 인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가 진영에 갇혀 눈과 귀를 꽉 닫은 세상이 되었다. 어른이 없어진 지 오래고, 시인은 시를 쓰지 않는다.

김지하 시 ‘무화과’에서 이런 논쟁이 오간다. 꽃 없이 열매 맺는 것이 무화과인가, 열매 속에 속꽃 피는 것이 무화과인가. 해석의 차이를 놓고 우리는 역사를 다툰다. 다시 시인을 만난다면 술 한잔 따르며 그것이나 여쭙고 싶다. “선생의 무화과는 뭐였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