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박종호의 문화一流] 피아니스트 푸총을 지켜준, 아버지에게서 온 수백 통의 편지

최만섭 2022. 5. 25. 05:12

[박종호의 문화一流] 피아니스트 푸총을 지켜준, 아버지에게서 온 수백 통의 편지

60년 전 동양인으로 유럽서 연주가 길 연 中 피아니스트 푸총
아버지 푸레이 “예술이 목적,기교는 수단” 편지 보내 가르침
문혁 때 반동으로 몰린 아버지, 아들 지키려 스스로 목숨 끊어

입력 2022.05.25 03:00
 
 
 

지난 2020년 12월 28일에 중국 태생의 피아니스트 푸충(傅聰·1934~2020)이 음악 팬들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서양인의 음악이라고 여겼던 클래식 분야에서 동양인도 그들만큼 또는 그 이상의 표현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린 인물이었다. 지금 세계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중국을 비롯해 동양인 연주가들은 첫 길을 뚫었던 푸충에게 신세를 진 셈이다.

푸충의 아버지 푸레이(傅雷·1908~1966)는 일찍이 파리에 유학하여 예술 이론과 미술사를 전공하고, 중국에서 번역가이자 예술 비평가로 이름을 떨친 지성인이었다. 그는 프랑스 문학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는데, 특히 발자크와 로맹 롤랑 작품에서는 권위자였다. 또한 푸레이는 두 아들을 자신이 직접 짠 커리큘럼으로 교육하였다. 그런 계획에는 전인적 교양 교육과 함께 피아노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큰아들 푸충이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다. 그렇게 피아노를 전공한 푸충은 17세에 고향 상하이에서 데뷔하였다.

이어 푸충은 바르샤바의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3위로 입상하였다. 1955년의 쇼팽 콩쿠르는 가장 실력자들이 참가했던 대회로, 1위 폴란드의 아담 하라시비츠, 2위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 등 막강한 피아니스트들이 나왔다. 푸충은 비록 3위였지만, 상위 3명의 차이는 근소하였으며 마주르카상도 푸충이 받았다. 이후로 푸충은 아시케나지, 아르헤리치, 플라이셔, 바렌보임 등과 나란히 1960~70년대 세계 음악계에서 가장 열띤 활동을 펼친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영국의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의 사위가 되었으며 스카를라티,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등 수많은 피아노 음반을 내었다. 그는 자신의 시대에 음악과 인격으로 존경받는 피아니스트였다.

푸총은 1955년의 쇼팽 콩쿠르에서 3위로 입상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에도 명성을 이어가며 동양인 연주가들의 클래식 세계 무대 진출의 길을 열었다. 왼쪽 사진은 1964년 푸총이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음반 녹음을 위해 연주하는 장면. 가운데 사진은 아버지 푸레이와 푸총(오른쪽). 오른쪽 위 사진은 푸레이가 푸총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아 출간한 책, 아래 사진은 푸총의 전집 음반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엘로퀀스 클래식·이린출판

그런데 푸충이 승승장구하던 1966년에 상하이에 있던 푸충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목숨을 끊는 비극이 발생하였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상하이예술대학 교수였던 푸레이의 집에 홍위병들이 들이닥쳐 가택 수색을 하며 반당의 증거를 찾았다. 4일 동안의 수색에서 어떤 단서도 나오지 않았지만, 푸레이의 고모가 맡겼던 상자에서 장제스(蔣介石)의 얼굴이 그려진 거울과 그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의 사진이 나왔다.

정직했던 푸레이는 남이 맡긴 물건이라 상자를 열어본 적도 없었다. 작은 물건 두 개로 푸레이는 반동으로 몰렸다. 푸레이는 결백을 증명하고 두 아들의 명예를 지키는 방법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뿐이라고 생각했다. 외국에 있던 아들에게 연락도 하지 못한 채 조카 앞으로 유서 한 장만을 남긴다. 유서에는 남겨놓은 돈으로 그달 치 집세를 내달라는 말과, 예금은 어려운 친척에게 주라는 당부, 그리고 남은 현금은 장례 비용으로 써달라는 내용 등이 있었다. 다음 날 새벽에 부부는 나란히 목을 매었다. 푸충이 엄청난 충격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세월이 흘러 1979년에 부부의 명예는 회복되었다. 19세의 홍안으로 부모 성원을 받으며 폴란드로 떠났던 푸충은 26년을 이역만리에서 떠돌았고, 45세의 중년이 되어서야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기다리던 부모님의 따뜻한 포옹 대신에 차가운 유해를 받았다.

1981년에 푸충은 이역에서 간직하고 다니던, 아버지로부터 받은 편지들을 책으로 출간하였다. 오고 가는 것이 쉽지 않았던 시절에 이국에서 활동하던 아들에게 푸레이는 수백 통의 편지를 보냈다. 비록 곁에 있지는 못했지만 부모로서 푸충을 지켜준 등불과 다름없는 편지들이었다.

아버지의 편지는 ‘부뢰가서’(傅雷家書·우리말 번역본 제목은 ‘상하이에서 부치는 편지’)로 출판되어 중국인들을 뜨겁게 감동시켰다. 서양 문화 전공자였지만 유가(儒家)로 자처했던 푸레이의 편지에는 유학을 바탕으로 하는, 엄격하면서도 자상한 아버지의 사랑이 절절하게 담겨있다. 그 편지들을 통해 세계인들은 푸충의 음악이 왜 그렇게 우아하고 그의 언행이 그리 단정했는지 알게 되었다. 푸충은 집안이 무너지는 참혹한 시련 속에서도 조국을 향해 침을 뱉은 적이 없었고 중국인의 존엄을 지키고자 가려서 행동하였다.

“아들아, 나는 너를 학대하였다. 영원히 너에게 미안할 것 같다…”며 아들을 음악가로 성공시켰음에도 엄격했던 자신을 자책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편지는 실로 감동적이다. 푸레이의 편지는 아들에게 예술가로서 나아가야 할 정신과 더불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본분을 일러준다. 그는 “목적은 예술이며 기교는 다만 수단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그리고 자신이 하루하루 성숙해가고 정신이 넓어지고 감정이 깊어지는 것을 기뻐해라. 이것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행복이 아니겠느냐”며 아들에게 사회적 성공보다도 내면적 기쁨을 강조했다. 이 편지들은 예술가와 예술 지망생들에게 가장 좋은 수양서이며, 부모들에게는 자녀에게 어떻게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는지, 부모의 사랑이 자녀를 훌륭한 경지에 이르게 한 실례를 보여주는 최고의 교육서다. 푸레이는 아들들에게 “우리 부부는 힘을 다해 경험과 이성을 바쳐서 너희의 충실한 지팡이가 되고 싶다. 그리고 어느 날, 너희가 이 지팡이가 귀찮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소리 없이 종적을 감추어 너희에게 절대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코로나19가 지나가고 있는 이 시기에 코로나로 세상을 떠난 선구적인 아시아인 피아니스트의 음악을 듣는다. 푸충이 남긴 음반에는 서양음악사의 위대한 음악이 모두 담겨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유럽에서 살아가면서도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평생 선명하고 꼿꼿했던 동양 선비의 삶이 가슴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