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제도

“생존자 고통 조롱하는 폭력과 진영 논리… 천안함과 세월호가 똑같더라”

최만섭 2022. 4. 9. 11:07

“생존자 고통 조롱하는 폭력과 진영 논리… 천안함과 세월호가 똑같더라”

[아무튼, 주말] [허윤희 기자의 발굴]

천안함 생존장병 10년 추적한
보건학자 김승섭 서울대 교수

입력 2022.04.09 03:00
 
 
 
 
 
김승섭 서울대 교수는 천안함 생존 장병들과 세월호 생존 학생들의 목소리를 현장에서 기록한 보건학자다.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전혀 다른 사건이지만 둘 다 한국 사회의 실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공통점이 있다"며 "트라우마 생존자를 대하는 폭력적 태도, 상대 진영이라 여겨지는 피해자의 고통을 조롱하는 진영 논리와 편협적 사고가 만연했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2010년 3월 26일 밤, 천안함이 침몰했다. 폭침이 발생한 오후 9시 22분, 한 배에서 같은 경계 근무를 하던 이들은 그 시간에 어디 있었느냐에 따라 삶과 죽음이 갈렸다. 함미(艦尾)에 있던 장병들은 사망하고, 함수(艦首)에 있던 장병들은 살아남았다. 죽은 사람은 영웅이 됐지만, 산 사람은 죄인이 됐다. 사망한 장병 46명은 화랑무공훈장을 받으며 숭고한 희생을 한 존재가 됐지만, 살아남은 장병 58명은 패잔병이라는 낙인과 싸워야 했다.

의사 출신 보건학자 김승섭(43) 서울대 환경보건학과 교수는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던 천안함 생존 장병 이야기를 추적했다. 데이터 분석을 통해 소방관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결혼 이주 여성 같은 특정 사회 집단의 건강 실태를 연구해온 그조차도 천안함 사건은 쉽게 발 담그기 어려운 주제였다. “진보와 보수 모두 정치적 이해 득실을 따지며 사건을 활용하고 있었고 무슨 이야기를 하든 ‘너는 어느 편이냐’부터 묻는 진영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사람들은 천안함 사건을 과거 일이라 여겼고, 생존 장병들이 모두 치료와 보상을 받고 국가유공자가 됐다고 잘못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다. 생존 장병들은 폭침 이후 얻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병원에서 치료받으며, 국가유공자가 되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생계를 위해 직장을 구하고, 가족과 친구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괜찮은 척 스스로를 포장해야 했다.

김 교수가 최근 펴낸 책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는 천안함 폭침에서 살아남은 생존 장병들이 그후 10년 동안 겪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자, 한국 사회가 이들의 상처를 어떻게 외면하고 덧나게 했는지 파헤친 기록이다. 지난달 서울대 연구실에서 김승섭 교수와 마주 앉았다.

2010년 12월 천안함 생존 장병들이 대전현충원 천안함 특별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당시 생존 장병 58명 중 최원일 함장을 포함한 현역 장병 51명과 전역 장병 4명 등 55명이 참석했다. 신현종 기자

#. (꿈속에서) 배에 있는 통로를 걸어가는데 그게 있었다. 종이 가방에 옷걸이가 많이 엉켜 있었다. 저거 꺼내야겠다. 하나 들었는데 이름표가 달려 있어. 근데 몇 개가 엉켜서 안 나와. 그러다 깼다. 꺼낸 애들은 살아 있는 애들이고 엉켜 있는 애들이 죽은 애들이었다. (생존 장병 C, 33쪽)

-천안함 생존 장병 연구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습니까.

“세월호 참사 생존자 연구가 끝나니 연구자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가 보였어요. 누군가 생생하게 경험을 몸으로 간직하고 있을 때 언어화하고 자료를 남기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2018년 한 언론사와 함께 ‘천안함 생존 장병 실태 조사’를 진행하면서 생존 장병들에게 ‘천안함에서 살아남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이메일을 보냈어요. 그중 24명이 설문조사에 참여해줬고, 7명이 심층 인터뷰에 응해줬습니다.”

-생존 장병들은 어떻게 살고 있었나요.

살아남은 58명 중 44명은 장교와 부사관, 즉 직업군인이었습니다. 이들 상당수가 천안함 사건 이후 직업군인으로서 꿈꾸던 삶을 포기했지요. 생존 장병들은 자신의 고통을 몸속 깊이 욱여넣은 채 지내고 있었습니다. 말할수록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이 고통스러워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괜찮은 척하는’ 연습을 하고 있었죠. 하지만 트라우마의 기억은 예고 없이 증상으로 나타났어요. 한 생존 장병은 탈출구 없는 폐쇄된 공간에 들어가면 불안도가 높아져 아직도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고, 다른 장병은 업무에서 벗어나 긴장이 풀리면 팔과 다리가 오그라들고 동공이 풀리는 발작 증상을 겪게 됐습니다. 많은 생존 장병이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고요.”

2018년 조사에서 생존 장병 가운데 사건 이후 한 번이라도 PTSD를 경험한 비율은 91.3%에 달했다. 58.3%는 극단적 선택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고, 29.1%는 실제로 자살을 시도했다. 김 교수는 “베트남 참전 군인 중 PTSD를 경험한 비율을 30%로 추정하는데, 이 숫자와 비교해도 천안함 생존 장병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알 수 있다”며 “천안함 생존 장병들은 군 생활을 하며 감당해야 했던 두 가지 낙인 때문에 더 고통받았다. 하나는 트라우마를 겪고 정신과 진료를 받는 사람에 대한 편견, 다른 하나는 전투에서 지고 돌아온 패잔병이라는 비난이었다”고 했다.

2017년 3월 26일 천안함 7주기 추모식 후 생존 장병들이 부서진 천안함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오종찬 기자

#. 천안함 사건 이후 두 생존 장병이 배 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한 상사가 지나가듯 말했습니다. “너희는 둘이 붙어서 이야기하지 마. 배 또 가라앉는다”라고요. 생존 장병 중 59.1%가 ‘생존자라는 이유로 함께 있기 께름칙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90쪽)

-정신 질환과 패잔병, 이중(二重) 낙인이 점점 더 그들을 고립시켰군요.

“군인의 트라우마가 처음 부각된 1차 세계대전 당시,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군인은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았습니다. 참된 군인이라면 두려움을 극복해야지 불안과 우울 증상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폭력적 당위가 상식으로 받아들여졌으니까요. 오늘날 한국의 군대 문화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직업군인으로 살아남으려면 실력 있고 유능한 군인이라는 걸 보여줘야 하는데, 군인으로서 패잔병이라는 단어는 치욕스러울 뿐 아니라 이 경우엔 정확하지가 않죠. 천안함 생존 장병의 95.5%가 군에서 ‘패잔병’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패잔병 호칭에는 전쟁에서 지고 온 군인이라는 무능함에 대한 비난뿐 아니라,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 함께하기 어려운 재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 묻어 있습니다. 잘못된 ‘레이블링(labeling·표지 붙이기)’인데 반박할 수 있는 통로가 없었죠. 그래서 대다수가 군대에서 쫓겨나듯 나와야 했습니다.”

-2020년 11월 한 생존 장병이 보낸 메일 한 통이 집필을 결심한 계기가 됐다고요.

“상이연금을 받기 위한 행정 절차를 진행 중인데 자신의 상태를 증빙할 자료가 없다는 내용이었어요. 이 연구를 담은 책이 세상에 나와야 했습니다. 천안함을 둘러싼 정치 공방에 휩싸여 정작 재난 이후의 삶을 이어가야 할 생존자의 고통에 무심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됐어요.”

-책을 쓰기로 결심하고 작년에 추가 조사를 진행했지요.

“2018년 조사 때는 생존 장병들이 저에 대한 신뢰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예민한 질문은 할 수 없었어요. 지난해 2월 최원일 천안함 함장님이 전역하면서 ‘나는 정권도, 진보·보수도 아닌 천안함 생존 장병 편’이라고 말하며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어요. 국방부 앞에서 팻말 시위하는 그들의 곁을 지키며 신뢰가 쌓였고, 추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3년 전 묻지 못했던 것들을 질문하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묻지 못했던 것들이 뭔가요?

“예를 들어 폭침 사건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왜 함장님은 군복을 입고 장병들은 환자복을 입었는지, 마땅히 물어야 했는데도 질문하기가 조심스러웠어요.”

천안함 폭침 사건 2주 만에 열린 생존 장병 기자회견에서 군복을 입은 최원일 함장(가운데)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군은 사고 발생 2주 만에 환자복 차림의 장병들을 모아놓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복장은 국방부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처음에는 군복을 입으라는 지시에 군복을 입었는데, 환자복으로 갈아입으라는 명령이 내려왔다고 한다. 최원일 함장에게는 별도 지시가 내려왔다. “환자복 입고 나가려는데 나는 군복 입으라고 다시 지시가 나오더라고요. 내 전투복은 배(천안함)에 있어서 다 잃어버렸는데 전투복을 마련해서 갖다 줬어요. 제 명찰까지 박아서.”(최원일 함장)

이 공개 행사는 결과적으로 생존 장병들에게 ‘패잔병’ 낙인을 강화했고, 천안함 사건에 대한 책임을 최원일 함장 개인에게 돌리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더구나 충분히 안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트라우마 경험을 말하거나 떠올리게 하는 것은 증상을 악화시키는 지름길입니다. 생존 장병 중 40.9%는 인양된 천안함으로 다시 들어가 유품을 찾으라는 명령을 받기도 했어요. 천안함에 탔던 대다수 생존 장병은 당시 나이가 20대 초반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이 배는 먹고 자고 일하는 일터이자 쉼터, 24시간을 같이 보낸 모든 기억이 있는 공간이었거든요. 천안함이 침몰했다는 건 이들에게 일터와 쉼터, 즉 직장과 가정이 동시에 사라져버린 경험이었다는 거죠.”

-출간 후 반응은 어땠습니까.

“최원일 함장님이 스타벅스 커피 쿠폰과 함께 ‘여태 나온 천안함 책 중 최고입니다’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어요.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죠. 진짜 군인입니다.”

#. 천안함은 산업재해 사건입니다.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군인들이 업무를 수행하다 목숨을 잃고 다친 일이니까요.(194쪽)

 

-2018년 실태 조사 당시, 대다수 생존 장병이 국가에서 아무 지원도 받지 못했다고요.

“당황스럽지만 실제로 그랬어요. 전역 이후 PTSD 치료비조차도 사비로 지불해야 했으니까요. 생존 장병 대다수가 국가유공자가 되기 위한 행정적 싸움을 진행하고 있었고, 심사에서 탈락한 이들은 국가에서 지원받는 돈이 전무했습니다. 생존 장병 중 누구도 자신의 신체적 부상과 정신적 상처로 상이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안내를 받은 적이 없었어요. 천안함 사건 발생 9년이 지난 2019년 11월이 돼서야 상이연금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죠.”

-천안함에서 순직한 장병 46명은 모두 국가유공자가 됐는데, 왜 같은 배에서 근무하다 살아남은 장병들은 국가유공자가 되기가 힘들었을까요?

“2018년 조사 당시만 해도 정신 질환으로는 국가유공자로 선정되기 어려웠어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국가유공자 신청을 했다가 ‘보이는 부상은 없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죠. 다행히 최근 보훈 심사에서 PTSD를 폭넓게 인정하는 추세로 바뀌고 있습니다. 천안함 생존 장병 가운데 국가유공자는 2018년 6명에서 현재 21명으로 늘었습니다. 천안함 생존 장병들의 지속적인 싸움 덕택에 미래의 군인들은 PTSD를 겪었을 때 국가유공자가 되는 길이 훨씬 크게 열린 것이죠.”

-천안함 사건을 ‘산업재해 사건’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그래야 피해 당사자들의 삶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동하다가 다친 이들에게 상이연금과 국가유공자 등록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이자, 한국 사회가 그들의 노동에 대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인 것이죠.”

-세월호와 천안함 생존자를 둘 다 연구했습니다.

“2016년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용역 연구 책임자로 세월호 참사에서 생존한 단원고 학생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2년 뒤, 천안함 사건 생존 장병 연구를 진행했죠. 천안함은 보수, 세월호는 진보의 사안으로 여겨지며 양쪽이 서로 활용했지만, 두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트라우마 생존자를 대하는 한국 사회의 폭력적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났고, 둘째 상대 진영이라 여겨지는 피해자의 고통을 조롱하는 진영 논리와 편향적 사고가 만연했죠. 구호와 구호가 부딪치면서, 당사자의 고통은 외면하고 정작 우리가 이 사건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놓쳐버리는 게 아쉬웠습니다.”

#. 사회적 폭력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경험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몸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때로는 인지하지 못하는 상처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아픔이 길이 되려면’ 22쪽)

김승섭 교수는 연세대 의대 98학번이다. 그는 "의대 다닐 때부터 노동자 건강에 관심이 많아서" 의사 대신 학자의 길을 택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김 교수의 카카오톡 프로필은 ‘공부하는 사람’이다. “공부를 정말 좋아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다잡으려고 하는 말”이라고 했다. 2017년 출판계에 벼락처럼 나타난 ‘스타 저자’. 첫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으로 한국출판문화상 등 출판 관련 상 14개를 휩쓸었고 그해 언론 매체가 선정한 ‘올해의 책’에도 꼽혔다. 서울대 수시 지원자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 20위 안에 유일한 국내 저자로 2년 연속 올랐다. 고용 불안이나 혐오, 차별, 재난 같은 사회적 상처가 어떻게 인간의 몸을 병들게 하는가를 데이터로 밝히고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 책이다. 출판 평론가 표정훈은 “과학적 근거, 논리적 설득력, 사회적 메시지, 여기에 사람에 대한 깊은 공감까지 갖춘 보기 드문 글”이라고 평가했다. 강연과 방송 출연 요청이 쏟아졌지만, 김 교수는 공부를 택했다.

-왜 강연 요청을 대부분 거절했습니까.

“그때는 저를 눌러야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논문을 쓰는 과정은 제가 초라해지는 과정이에요. 앉아서 읽고 줄 치고 메모하고, 끙끙대면서 계속 써서 냈는데도 리젝트(거절)당하고, 다시 써내는 과정이거든요. 매일 앉아서 책과 논문을 읽을 수 있는 몸과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게 학자로서 중요했습니다.”

-고통을 수치화하는 엄정한 작업인데 감성적 언어로 풀어내 술술 읽히더군요.

“책이 문화의 중심에 있던 시대는 지났어요. 사람들은 더 이상 예전만큼 책을 읽지 않죠. 심지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책들을 누가 읽을까, 그럼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합니다. 학자로서 말할 수 있는 것과 완전히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서 느낀 감정이 만나는 지점에서, 최대한 정갈한 언어로 글을 쓰려고 합니다. 문체를 존댓말로 쓰는 것도,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다가갈 수 있는 지점을 찾으면서 문을 계속 두드려보는 거예요.”

 
김승섭 교수는 "사회적 상처로 아파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가 닿기를 바라면서 글을 쓴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고통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나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사회 구조적 폭력에서 기인했을 때, 공동체는 그 고통의 원인을 해부하고 사회적 고통을 사회적으로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아픔이 길이 되려면’ 176쪽)

김 교수는 연세대 의대 98학번이다. “의대 다닐 때부터 노동자 건강에 관심이 많아서” 의사 대신 학자의 길을 택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석사, 하버드대에서 산업보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교수를 거쳐 올해 3월 서울대에 임용됐다.

-노동자 건강에 관심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한데요.

“서울 구로공단 뒤쪽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공단 풍경이 익숙했는데 그런 성장 환경이 영향을 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은행원이었는데 IMF 때 해고당하셨어요. 한 번도 넉넉한 적 없었지만 어머니가 ‘이건 내 몫’이라면서 버텨주셨고요. 대학 가서 산업재해를 입은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을 계속했어요. 한번은 봉사 활동 가려고 선배들이랑 출발했는데 버스가 우리 집 쪽으로 가는 거예요.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 사무실이 바로 집 근처에 있었어요. 우리 동네가 이런 곳이었구나 했지요.”

-이전 연구는 어떤 게 있습니까.

“소방 공무원 인권 상황 실태 조사를 했는데, 그들은 위험한 현장과 고된 업무만이 아니라 다양한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업무 중 일반인에게 ‘얻어맞는’ 일을 겪으면서도 대부분 소속 기관에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보고해도 후속 조치가 없기 때문이죠.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50.5%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받았을 때는 혼란스러웠습니다. 걸프전 참전 군인(22%)이나 전쟁 포로로 잡힌 군인(48%)보다도 높은 유병률이었으니까요. 정리 해고와 공장 점거 파업에서 겪은 일들이 인간의 몸에 깊은 상처를 낼 수 있다는 거죠. 실제로 그들은 뇌출혈, 심장마비, 당뇨 합병증으로 죽어 갔습니다. 가장 흔한 사망 원인은 자살이었고요.”

-천안함 생존 장병에 대한 책을 쓰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걱정했다고 서문에 썼던데요.

“세월호 생존 학생 연구나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연구를 마치고 나서 불쑥 떠오르는 이미지들 때문에 상담 치료를 받았어요. 그들이 겪었던 고통스러운 시간에 공감하고 같이 화가 났다가도 괜찮은 줄 알고 지내다가 어느 순간 예민해지는 경험을 했죠. 세월호 현장을 취재한 기자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목공을 하면서 좋아졌어요. 주말마다 나무를 만지고 자르고 몸을 쓰면서 조금씩 치유가 되더라고요.”

-상담 치료를 받을 만큼 괴로운 일을 왜 계속합니까.

“저는 앞선 세대가 만들어놓은 민주화와 경제 발전의 토대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잖아요. 이렇게 공부하고 활동할 수 있는 무대라는 것도 그저 주어진 게 아니라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시간 위에 서 있는 거니까요. 역사라는 게 일종의 이어달리기 같아요. 다음 세대가 더 나은 질문과 고민으로 자신들의 싸움을 할 수 있도록, 바통을 넘길 때까지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려고 합니다.”

그는 열네 살, 열두 살, 아홉 살 난 세 딸의 아버지다. 연구실엔 둘째 딸이 크레용으로 그려준 동물 그림이 놓여 있다. “5000원 주면서 아빠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림을 그려달라고 주문했더니 잠자는 부엉이와 곰을 그려줬다”고 했다. “사회적 상처로 아파하는 분들에게도 제 책이 그런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픔이 타인에게 쉽게 가 닿기 어렵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나눠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