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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선 ‘9·11′ 獨선 ‘장벽’… 젤렌스키 연설, 푸틴 총보다 강해

최만섭 2022. 3. 19. 10:36

美선 ‘9·11′ 獨선 ‘장벽’… 젤렌스키 연설, 푸틴 총보다 강해

나라별 ‘맞춤형 연설’로 각국 지지 여론 끌어내

입력 2022.03.19 03:00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일 EU의회, 8일 영국 의회, 16일 미국 의회, 17일 독일 연방하원을 대상으로 화상 연설을 했다. 젤렌스키는 각 나라의 역사를 예를 들며 감동적인 연설을 해 박수를 이끌어 냈다.

“숄츠 총리, 저 벽을 허물어 주십시오!”(독일 연방하원 연설) “숲에서, 들판에서, 거리에서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계속 싸울 것입니다.”(영국 하원 연설) “진주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매일 진주만과 9·11을 경험하고 있습니다.”(미국 의회 연설)

미국과 유럽 등 서방 각국의 의회를 상대로 연일 펼쳐지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연설 외교’가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일방적인 지원 호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국가가 외세에 당한 침략과 중요한 사건으로 인해 힘들었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맞춤형 연설’로 각국의 여론을 설득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일(현지 시각) 독일 프랑크푸르트 뢰머 광장에서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대형 전광판에 나온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러 항전의 구심점인 젤렌스키 대통령은 최근 서방 각국의 의회를 상대로 해당 국가의 역사적 사건 등을 떠올리게 하는 ‘맞춤형 연설’을 이어가며 지원과 관심을 호소하고 있다./AP 연합뉴스

젤렌스키 대통령은 17일(현지 시각) 독일 베를린 연방하원 연설에서 독일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을 거부하고, 러시아와 공동 투자한 ‘노르트스트림2′ 가스관 포기에 반대했던 것을 언급하며 “유럽(독일)과 우크라이나 간에는 아직도 장벽이 서 있다”며 “지금 저 벽을 허물어 달라”고 했다. 1987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 대통령이 베를린 장벽 앞에서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에게 외친 말을 되풀이한 것이다. 이 발언은 40년 이상 계속된 동·서독 분단이 막을 내리는 신호탄이 되면서 독일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이를 환기시킨 것이다.

16일 미국 의회 연설에서는 미국인들의 쓰라린 기억인 1941년 12월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2001년 9월 알 카에다의 9·11 테러를 거론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진주만의 하늘이 미국을 공격하려는 비행기로 물들었던 것을, 악이 당신의 도시를 전쟁터로 만들려 했던 9월 11일을 상기하라”며 “두 사건 모두 미국의 하늘을 통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뤄졌다”고 강조했다. 미국 사회를 일깨우는 계기가 됐던 역사적인 두 사건을 언급,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거부하는 우크라이나 상공의 비행 금지 구역 설정을 재차 호소한 것이다.

영국 하원에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을 인용했다. 그는 “우리는 바다에서, 하늘에서 끝까지 싸울 것”이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계속해서 우리 땅을 위해 싸울 것”이라고 했다. 처칠이 1940년 6월 독일군에 패배해 프랑스 됭케르크에서 철수한 뒤 “우리는 프랑스에서 싸울 것이고, 바다와 대양에서 싸울 것이며,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 섬을 지키겠다”고 한 것을 그대로 응용했다.

캐나다 의회 연설에서는 우크라이나 키이우(키예프)와 하르키우, 마리우폴에서 벌어지는 무자비한 폭격 상황을 캐나다 밴쿠버와 오타와, 토론토에 비유해 묘사했다.

 

주요 외신 매체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연설을 다각도로 분석하며 높이 평가했다. 미국 경제 주간지 포브스는 “그의 연설 기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2400년 전 확립한 ‘웅변술’의 표본”이라고 했다. 청중이 잘 아는 사실을 토대로 주장을 밀고나가 설득의 힘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나라마다 다른 내용의 연설이지만 일관된 메시지를 전한다. 미국 LA타임스는 “우크라이나의 투쟁이 서방의 ‘민주적 가치’를 지키는 싸움이며, 절대 굴복하지 않으니 계속 지원을 해달라는 것, 비행 금지 구역을 설정해 달라는 메시지가 반복된다”고 분석했다. 이 신문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청중의 마음을 읽는 연설 행진으로 카리스마를 드러냈다”며 “(러시아를 상대로) ‘말’이라는 무기를 휘두르고 있다”고도 했다. 코미디언 출신의 젤렌스키는 때로는 유창한 러시아어와 영어를 활용하기도 한다. 러시아가 침공을 개시한 지난달 24일에는 러시아 국민을 대상으로 “즉각 침략 행위를 멈춰 달라”는 연설을 했다. 16일 미국 의회 연설에선 우크라이나의 참상을 보여주는 동영상 상영 후 영어로 직접 “평화의 지도자가 돼 달라”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적극적인 도움을 요청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22일 이탈리아 상·하원을 대상으로 연설하고, 다음 날 일본 의회에서도 연설할 계획을 갖고 있다. NHK는 18일 “일본 여야 원내대표가 다음 주 중 젤렌스키 대통령의 국회 연설을 준비하기로 합의했다”고 전했다. 자민당 다카기 쓰요시(髙木毅) 국회 대책 위원장은 “(온라인 연설의 전례가 없다는) 기술적 문제가 있지만, 가능한 한 빨리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연설을 계기로 그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우크라이나 현지 매체에 따르면 유럽의회와 영국, 네덜란드, 에스토니아 등 출신의 전·현직 정치인 36명이 지난 11일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에 서한을 보내 “젤렌스키 대통령을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기 위해 후보 추천 기한을 이달 31일까지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우크라이나 정부는 한국 국회에서도 젤렌스키 대통령의 화상 연설을 추진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은 18일 이에 대한 본지 질의에 ”현재 관련 절차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국회 화상 연설이 성사될 경우 한국은 러시아에 맞선 서방 자유 진영의 핵심 일원으로 주목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조선일보 주말뉴스부 이옥진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