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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이브, 폴 오스터가 마스크를 선물한 걸까

최만섭 2020. 12. 23. 05:10

성탄 이브, 폴 오스터가 마스크를 선물한 걸까

2020 미니픽션, 코로나와 나

문지혁 소설가

입력 2020.12.23 03:00

 

 

 

 

 

① 이혁진 - 돼지방어

② 문지혁 - 어떤 선물

③ 장강명 - 또 만나요, 시리우스 친구들

문지혁 소설가

지하철역 근처의 약국을 발견한 것은 이사 직후였다. 집에서 역으로 가는 길 중간쯤에 있는 약국은 이면도로 안쪽으로 들어와 있어서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위치였다. 두통약과 진통제를 달고 사는 인생인 탓에 나는 약국 위치를 눈여겨보았고,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애드빌하고 타이레놀 있나요?”

약국에는 나이 지긋한 약사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돋보기안경을 낀 채 책을 읽고 있었는데, 직업병이 발동해서인지 책에 먼저 눈길이 갔다. 나를 발견한 그녀가 책을 덮으며 못 들었다는 제스처를 했고 나는 약 이름을 다시 한번 크게 말했다. 약사가 약을 찾는 사이 나는 책 표지를 확인했다.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 그러고 보니 약국 안쪽에 한 무더기 쌓인 책 기둥이 보였다.

“좋은 책 읽으시네요.”

 

카드를 돌려받으며 내가 말했다. 그 말이 무례하게 들렸던 걸까? 약사는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올해 초 일이니 그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었고 약국은 어디 할 것 없이 붐볐다. 지나다니면서 본 그 약국 창문에는 한동안 ‘마스크 없음’이라는 정갈한 손글씨가 붙어 있었다. 아마도 약사는 책 읽을 시간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약국을 지날 때마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같은 ‘에브리맨’의 문장을 되뇌며 필립 로스를 읽는 늙은 약사를 떠올렸다. 1년 동안 두통은 더 잦아졌고, 그럴 때마다 약국에 들러 말없이 약을 샀다. 이부프로펜과 아세트아미노펜을 개발한 사람들이야말로 나에겐 동방박사였다.

 

학기 말이 다가오면서 정신이 없어졌다. 수업마다 학생들 소설 합평이 진행 중이었고 그와 별개로 진도도 나가야 했다. 준비할 것도, 읽고 의견을 내야 할 것도 많았다. 결이 다른 텍스트 속에서 길을 잃고 있다가 퍼뜩 정신이 들면 학교에 가는 식이었다. 비대면 수업이기는 했으나 나는 학교에 가서 교실에 혼자 앉아 줌으로 화상 수업을 했다. 학생들 대부분은 화면을 끄고 있으니 정확히는 수십 개의 검은 상자들을 바라보며 떠드는 시간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오늘 다뤄야 할 소설은 이번 학기의 마지막 텍스트, 폴 오스터의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였다.

 

가방을 챙겨 지하철역으로 향하다가 문득 바깥바람이 시원하다는 걸 느꼈다. 겨울이니까 당연히 찬 바람이 불겠지만 유독 서늘하고 청명한 공기였다. 계절을 감각하는 능력이 갑자기 좋아지기라도 한 걸까,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걷다가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마스크를 빼먹은 거였다. 나는 길을 걸어오면서 평소보다 나를 더 쳐다보던 사람들의 눈길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단골 약국이 보였다. 다행히 ‘마스크 없음’이라는 손글씨는 보이지 않았다. 소매로 입을 가리고 약국으로 뛰어 들어가 손으로 마스크를 그렸다. 조용히 앉아 있던 약사는 금세 내 손짓을 알아듣고 마스크를 꺼내주었다.

 

제네시스 GV70 견적내기

 

/일러스트=안병현

계산하려고 하니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주머니에 늘 넣고 다니던 핸드폰마저 없었다. 가방에 들어 있는 책이며 노트들을 약국 매대 위에 급하게 올리며 찾았지만, 역시 없었다. 그제야 식탁 위에 가지런히 3단으로 쌓아두었던 지갑-핸드폰-마스크가 생각났다. 마스크도 마스크지만 지하철도 타야 하는데. 수업 시작에 맞추려면 시간이 빠듯한데. 당황한 나머지 횡설수설하기 시작한 나에게 약사는 자신의 귀를 가리키며 X자를 그어 보였다. 그러더니 빈 종이와 볼펜을 내밀었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썼다.

—죄송하지만 마스크와 현금 3000원만 빌려주세요. 저녁에 갚겠습니다.

약사는 한동안 내 글씨를 쳐다보더니 주머니에서 5000원짜리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그리고 매대 위에 올려진 폴 오스터의 책을 집어 들고는 나를 보며 고개를 까딱, 했다.

*

“뉴욕타임스로부터 단편 청탁을 받은 폴은 오기 렌에게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삽니다. 점심 한 끼를 사주고요. 오기는 폴에게 자기가 어떻게 크리스마스에 카메라를 훔치게 되었는지에 관해서 이야기하지요….”

책도 없이 수업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게 끝내고, 옆 교실에 있던 동료 강사에게 1만원을 빌려 집으로 향했다. 약국에는 여전히 사람이 없었다. 들어가 보니 약사는 약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까는 죄송했….”

말을 하려다가 나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문장을 적었다.

—아까는 죄송하고 감사했습니다. 1만원입니다.

종이를 내밀자 약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 번 더 적었다.

—책을 좀 돌려주시겠어요?

약사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매대 아래쪽에서 묵직한 검은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나는 봉지를 받아든 채 고개를 숙이는 둥 마는 둥 하고 약국을 빠져나왔다. 어두워진 거리를 걷고 있자니 자꾸 손에 든 봉지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로등 밑에 서서 봉지를 열자, 거기엔 아까 맡겨 둔 소설책만 들어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늘 사는 애드빌, 타이레놀, 그리고 KF94 마스크가 들어 있었다. 나는 뜻하지 않은 크리스마스선물을 받은 것만 같아 마음이 찡해졌다. 마스크를 통과한 콧김이 안경을 뿌옇게 흐렸다. 감동의 메시지라도 적혀 있을까 싶어 책을 펼친 순간, 나는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실려 있는 11페이지부터 25페이지까지의 책장이 깨끗하게 잘려 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