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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다방] 엄마의 마음이 바뀌었다... “시집가, 예쁠 때 시집가”

최만섭 2020. 12. 5. 09:48

[별별다방] 엄마의 마음이 바뀌었다... “시집가, 예쁠 때 시집가”

[아무튼, 주말]

조선일보

입력 2020.12.05 03:00

 

 

 

 

 

일러스트= 안병현

우리는 달의 이면을 보지 못합니다. 달이 늘 우리 쪽을 바라보며 부지런히 돌고 있으니까요. 부모님이 우리를 애써 기르실 때 우리는 그분들의 뒷모습을 알지 못합니다. 그 고난의 자전과 공전이 끝나고 이젠 우주의 가운데에 우뚝 멈춰 서실 때, 가렸던 절반의 진실을 보게 되지요. 당신도 미처 몰랐던 인생의 뒷면을. / 홍 여사

 

“옷이 그게 뭐냐? 잘 입고 다니지.”

엄마가 늘 하던 말을 오늘은 아버지가 하십니다. 새벽까지 잠 못 들고 서성였다는 엄마는 낮잠에 빠져 있고, 덩달아 잠을 설친 아버지는 충혈된 눈으로 저를 보고 계십니다. 마흔이 훌쩍 넘도록 ‘시집을 못 보낸’ 딸이 그저 애잔하신 걸까요? 저는 피식 웃으며 말합니다. 다음엔 예쁘게 입고 올게요.

오늘은 엄마의 일흔세 번째 생신. 예년 같으면 시집간 딸들 모두 짝을 데리고 축하하러 와 있었을 텐데, 올해는 결혼 안 한 저만 와 있네요. 아무도 오지 말라고, 아버지가 단호히 말씀하셨거든요. 코로나 시국에 곧 수능 볼 큰 손주 녀석을 생각해서라도 조용히 그냥 넘어가자고, 그게 엄마 뜻이라고요.

 

우린 요즘 그 어느 때보다 아버지 말씀을 잘 듣습니다. 특히 엄마에 관한 모든 결정은 아버지께 전적으로 맡기고 따르지요. 초로기 치매로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엄마를 24시간 곁에서 돌보는 유일한 사람이 아버지이기에 ‘엄마의 뜻’에 관한 한 아버지의 해석과 결단보다 더 중요한 목소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엄마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보호자일 뿐만 아니라, 때론 야단치고 감시하고 속이기도 하는 관리자입니다. 또한 엄마의 새로운 언어를 해독해내는, 엄마에 관한 ‘전문가’입니다. 아버지 덕분에 일상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우리 딸들은 감사한 마음과 더불어 부끄러운 마음도 큽니다. 엄마가 늘, 아들 넷과는 절대 안 바꾼다 했던 자랑스러운 딸 넷. 우리 넷이 뭉치면 엄마 한 분 남 부러울 것 없는 노년이실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아버지 혼자서 해내는 일을 우리 넷은 십 분의 일도 하지 못합니다. 남편과 아이들이 있고, 각자의 일과 살림이 있는 딸들은 병든 엄마를 어쩌지 못하고 멀리서 안타까워 발만 동동 굴렀죠. 그러다 이젠 그마저 익숙해져서, 아버지의 말씀과 지시만 믿고 따르는 형편이고요.

 

아무도 오지 말랬지만, 식구가 없는 저는 장을 봐서 부모님을 뵈러 왔죠. 아버지는 내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그러시더군요. “하여간 넌 어려서부터 내 말 참 안 들었지.” 늘 듣던 말인데 오늘 따라 이상하게 그 말씀이 아프게 느껴져, 저는 아버지 대신 엄마를 꼭 안았습니다. “엄마. 둘째 왔어. 멋쟁이 둘째.” 엄마는 누군지 안다는 듯 제 뺨을 어루만지시며 따라 하시더군요. “응, 멋쟁이 둘째….”

건강하실 때 엄마는 저를 늘 그렇게 불렀습니다. 삼십 대 후반까지 결혼 생각 없이 일만 하는 딸에게 절대로 시집가라는 말씀은 안 하셨죠. 결혼하란 잔소리는 아버지가 도맡아 하셨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제 바람막이가 돼주셨습니다. 결혼이 뭐 좋은 거라고 딸 넷을 다 못 시켜 난리유? 넷 중 하나쯤은 제멋대로 살아봐도 좋잖아? 늘 그러시던 엄마가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딸의 얼굴을 새삼스레 들여다보시며, 눈가의 주름 마흔다섯 개를 눈으로 세시더니 “시집 가. 예쁠 때 시집 가” 하시는 겁니다. 게다가 그 순간 제 어깨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버지 말씀은 더욱 놀랍습니다. “에잇, 결혼 그거 뭐 좋은 거라고. 혼자라도 저만 재밌으면 됐지. 안 그러냐?”

요즘 저는 부모님 때문에 놀라곤 합니다. 엄마가 하던 말을 아버지가 하시고, 아버지가 하던 말을 엄마가 하시니까요. 그동안 두 분은 늘 진심의 반쪽만 꺼내 보이며 살아오셨던 걸까요? 그럼 아버지를 답답해하던 엄마, 엄마를 버거워하던 아버지의 모습도 진심의 절반씩이었을 뿐일까요?

 

두 분은 자타가 공인하는, 궁합이 안 맞는 부부였습니다. 평생을 딴 맘 없이 서로에게 충성하면서 어쩌면 사흘이 멀다 하고 다툴 수가 있을까요? 문제는 기질 차이였습니다. 엄마는 낭만적이고 열정적이고 재주 많은 팔방미인, 아버지는 성실하고 꼼꼼한 천생 교육자. 엄마는 아버지를 꼰대에 샌님이라 놀렸고, 아버지는 엄마를 아무 대책 없는 여자라 험담했죠. 딸 넷은 유전자를 나눠 가져, 홀수 번은 아버지를 닮은 성실파이고 짝수 번은 엄마를 닮은 낭만파였습니다. 둘째인 저는 엄마를 가장 닮은, 아버지와는 상극이었던 딸이죠. 중학교 때던가? 우리 집 첫 차를 장만한 기념으로 가족이 다 함께 교외로 드라이브를 간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운전하고, 엄마는 콧노래를 부르고, 딸 넷은 뒷자리에 끼어 앉아 재잘대던 그 유원지의 토요일이 아마 우리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날 아버지는, 아니나 다를까 한껏 부푼 추억의 한 장면에 찬물을 끼얹으시더군요. 식구가 여섯인데, 밥값이 얼마며, 커피 값이 웬 말이냐며 어서 집에 가서 찬밥 데워 먹자고 하시는 겁니다. 아버지는 매사에 그런 식이었습니다. 어린 저는 자연스레 생각이 굳어갔죠. 엄마는 아버지 같은 사람과 살기엔 아까운 여자라고. 나는 절대로 저런 남자와는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요.

그런데 지금 보니, 인생은 평면이 아닌 입체였습니다. 엄마는 아버지의 그 숨 막히는 성실성과 꼼꼼함 덕을 지금 크게 보고 있으니까요. 꼰대에 샌님이 아니었다면 십 년을 불평 없이 병든 아내를 보살필 수 있었을까요?

 

“너 이거 한번 입어봐라.”

건넌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아버지가 옷 한 벌을 들고 나오십니다. 저는 첫눈에 그 옷을 알아봤습니다. 제 대학 졸업식 때 엄마가 입고 오셨던 양가죽 코트. 무려 이십 년이 넘은 옷인데도, 값을 꽤 주고 산 물건이라 그런지 가죽 질감만은 변함이 없어 오히려 놀라웠습니다. 짠돌이 울 아버지는 이 값비싼(?) 옷을 재활용하여 ‘시집 못 간 늙은’ 딸의 겨울을 품어주고 싶으셨던가 봅니다. 저는 두말없이 옷을 걸치고 아버지 앞에서 아이처럼 한 바퀴 빙 돌아 보였습니다.

“어때요? 아버지. 아직 봐줄 만해요?”

“그래. 내 눈엔 아주… 네 엄마랑 영판 똑같다.”

묵직한 가죽을 잠자리 날개처럼 펄럭이며 이리저리 돌던 저는 그 순간 우뚝 멈춰 서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옷이 아까워 저를 입힌 게 아니었습니다. 그 옷을 입고 즐거워하는 아내를 한 번 더 바라보고 싶어, 딸 중에 아내를 가장 많이 닮은 둘째에게 한번 걸쳐본 것이었습니다. 돌아다본 아버지 눈은 그새 젖어 있더군요.

 

“아… 아버지….”

결혼을 통해 바라본 인생은 평면도 입체도 아닌 4차원인 듯합니다. 재주꾼 엄마는 지금 아버지의 현실 감각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고, 잔소리꾼 아버지는 그 옛날 대책 없던 멋쟁이 아내를 대책 없이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젊고 아름다울 때 서로 못 견디던 두 분이, 병들고 지친 지금은 서로 곁에 두고 그리워합니다. 그런 평생의 짝을 갖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여태 혼자인 저는 상상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제 선택에 후회는 없지만, 우리 부모님같이 평생을 함께해온 노부부를 보면 요즘은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제 인생이 작고 예쁜 그림 엽서라면 그분들의 인생은 평원 한가운데에서 석양을 바라보고 선 두 거대한 석상 같은 느낌이랄까요? 어느 각도에선 기괴하고 흉하지만, 둘이 함께 노을에 젖는 마지막 순간만은 장엄하게 빛나는…. 어른이 되고 처음으로, 저는 아버지에게 진심 어린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버지 손을 꼭 잡고, 난생처음 진심이 가득 담긴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버지 같은 남편을 못 얻어서, 어쩌면 좋아요, 저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사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