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으로 차지했다” 승자의 오만이 乙의 반란 부른다
입력 2020.11.28 03:00
공정하다는 착각|마이클 샌델 지음|함규진 옮김|와이즈베리|420쪽|1만8000원
왕과 귀족이 다스리던 시대에, 능력에 따른 성취라는 개념은 패러다임의 일대 전환이었다. 능력이란 잣대 앞에 서면 모두가 평등했다. 그런데 ‘정의란 무엇인가’로 우리 사회에 정의 열풍을 일으켰던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이 통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지난가을 출간한 새 책은 ‘능력이라는 폭정’(The Tyranny of Merit)이란 원제에서도 알 수 있듯 능력주의가 더는 공정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폭정의 얼굴을 하고 사람들을 억압한다고 진단한다.
성공이 오로지 개인의 노력에 좌우된다는 믿음이 잘못됐다는 저자의 지적은 사실 새롭지 않다. 부모 잘 만나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고 스펙 잘 쌓은 아이가 명문대 들어가 신(新)특권층화한다는 비판도 이미 숱하게 제기된 문제다. 신자유주의의 깃발 아래 시작된 ‘시장 주도의 세계화’가 보통 사람들에겐 무익했거나 더 나아가 생존권을 위협했다는 지적도 새롭지 않다. 그런데도 이 책엔 민주주의의 성숙과 안착을 바라는 이들에게 일종의 각성을 촉구하는 미덕이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직접적인 위기는 포퓰리즘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하고 영국 브렉시트 투표가 가결된 2016년을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에 일대 반격을 가한 해로 꼽는다. 세계화의 온갖 과실을 수십년 독점해 온 엘리트들을 향해 민초들이 벌인 분노의 복수극이란 것이다. 당시 대선에서 대학 학위 없는 백인 유권자 3분의 2가 트럼프에게 몰표를 던졌다는 사실은 이 반란이 도덕적으로 온당한지 따지는 행위를 무의미하게 한다. 오직 포퓰리스트 득세와 민주주의의 타락을 막는 실질적인 조치만이 유효할 뿐이다.
영국기 문양 옷을 입은 남성이 지난 1월‘안녕, EU’라고 쓴 종이를 들고 브렉시트 축하 시위를 하고 있다. 브렉시트는 엘리트 독식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능력주의 세상에서 패배한 이는 실패를 오로지 ‘자신이 못난 탓’으로 돌리는 모욕까지 떠안는다. 이로 인한 좌절과 분노가 승자의 오만과 충돌하면 민주주의의 근간인 연대를 훼손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코로나 19 사태를 맞아 미국이 보인 혼란과 반목, 공공선의 실종 근저에도 연대 의식의 훼손이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 성쇠는 연대 의식 회복 여부에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유주의에 근거한 하이에크의 경제 사상과 존 롤스의 정의론을 반박하면서, 계층 간 이동성만 강조하는 능력주의는 근본적으로 평등의 가치를 외면하기 때문에 정의로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신앙으로도 비판을 확장, 직업적 성공을 구원의 징표로 여기는 칼뱅의 소명론과 번영을 은총의 증거로 보는 섭리론에도 능력주의 사고가 깃들어 있다고 지적한다. 능력주의는 가난한 이들만 비참하게 할 뿐 아니라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승자마저 포박한다는 점에서 모두를 패자화한다.
어떻게 능력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을까. 우선 ‘승리에는 운도 따랐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겸손해져야 한다. 그래야 가진 자들 맘대로 세상을 주무르고 전리품을 독식하는 능력주의의 폭정을 멈출 수 있다. 교육 제도를 개선하고 일의 가치에도 차별을 두지 말자고 촉구한다. 특히 명문대가 앞장서 제비뽑기로 학생을 선발하자는 제안은 혁명적이다. 다만 수학 능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으니 기준 성적을 정한 뒤 10배수를 선발하고 이 중 추첨으로 합격자를 정하면 명문대생이라며 뻐기지도, 못 들어갔다고 자책하지도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민주주의는 자유주의가 환호하는 기회의 평등도 사회주의가 맹신하는 결과의 평등도 아닌 조건의 평등을 통해 추구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 의회 도서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남녀노소, 피부색, 빈부 차이를 떠나 모두가 만날 수 있는 열린 공간에서 사람들은 다양성을 인식하고 더불어 살아가며 공동선을 추구할 수 있다고 한다. 유능한 관료가 오히려 민주주의의 적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눈길을 끌지만 우리 사회에 적용하긴 어려워 보인다. 한국에선 포퓰리즘에 물든 정치인이 관료의 전문성을 무시하고 온갖 비효율을 양산하고 있지 않은가.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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