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철의 아웃룩] 진보도 보수도 아닌 트럼피즘에 휘둘리는 미국 정치
전성철 글로벌 스탠다드 연구원회장
입력 2020.12.02 03:00
미국 대선에서 낙선자가 선거 결과 승복을 거부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거기에 수천만 유권자들이 그 부정선거 주장에 동조하며 ‘4년 후’를 외치는 것도 당연히 초유의 일이다.
왜 이럴까? 한마디로, 이번 선거는 그 근본 패러다임이 과거 어느 대선과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미국 대선의 패러다임은 항상 보수·진보라는 전통적인 두 이념 간 대결이었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달랐다. 한마디로, 이번에는 ‘진보’와 경쟁한 것이 ‘보수’가 아니라 ’'트럼피즘'이라는 새로운 이념이었다. 즉, ‘진보’ 대 ‘보수’가 아니라 ‘진보’ 대 ‘트럼피즘’의 대결이 된 것이다. 투표 결과가 이를 보여 주고 있다.
미국 대선 결과 연표
강자 공화당·약자 민주당 구도 깨져
고래로, 미국 사회의 강자들은 보수 정당(공화당)을 지지했고, 약자들은 대체로 진보 정당(민주당)을 지지해왔다. 그런데 이번은 이 공식이 깨졌다. 브루킹스연구소가 분석한 바에 의하면, 이번 선거에서 미국 경제의 70%를 차지하는 지역이 ‘보수’ 트럼프 후보가 아니라 ‘진보’ 바이든 후보를 선택했다. 즉, 부자 지역에서 진보 바이든이 훨씬 더 많이 이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여기서 잃은 것을 어디서 만회했을까? 매킨지컨설팅사 분석에 의하면 트럼프는 그것을 전통적인 진보 지역에서 만회했다. 2007년 이후, 미국 수많은 도시 중 불과 25곳에서 미국 일자리 전체의 3분의 2가 창출됐는데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를 찍은 표의 대부분이 이 25곳 이외 도시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일자리가 줄어들거나 농촌 등 낙후된 지역에 사는 약자들이 트럼프, 즉 보수당 후보를 지지했다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대이변이었다. 왜 약자들이 자기를 지켜주는 ‘진보당’을 버리고 보수당 후보를 택했을까? 한마디로 그들이 트럼프를 전통적인 ‘보수’ 후보로 보지 않고 소위 ‘트럼피즘’이라는 새로운 이념의 구현자로 봤기 때문이었다.
트럼피즘은 ‘미국 우선주의'
‘트럼피즘’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미국 우선주의’다. 미국이 2차 대전 이후 근 70년간 해온 세계의 ‘어른 노릇’ 이제 그만하고 미국 국민 실속 차려주는 데 주력하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세계주의’는 너무 ‘비싸게’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해외 미군 주둔 비용, 중동 평화 유지 비용, 각종 세계 기구 분담금 등 이 돈을 이제 세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 국민을 위해 써야 한다는 주장이다.
4년 전 트럼프는, 바로 이 점을 소리 높여 외쳤다. 그 외침은 미국의 소시민, 특히 서민들에게 어마어마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트럼피즘’이 결국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트럼프는 취임 이후 과감하게 자신이 외쳤던 바를 실행에 옮겨 나갔다. WTO(세계무역기구), 파리 기후 협약, 세계 항공 협정, 이란 핵 협상 등에서 다 과감하게 탈퇴하고 동맹국들에게는 더 많은 방위비 분담 등을 요구하며 좌충우돌했다. 트럼프가 이렇게 세계를 대상으로 안면 몰수까지 하면서 과감히 자신의 약속을 이행하는 데 대해 미국 서민들은 환호했다. 이 환호에 기름을 부은 건 바로 성공적인 경제 정책이었다. 과감한 감세, 이자율 인하, 규제 완화 등을 통해 실업자를 줄이고 경제를 큰 폭으로 성장시켰다. 미국의 서민들은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라는 예상치 못한 악재로 비록 낙선하긴 했지만, 트럼프는 무려 7000만 표가 넘는 미국 역사상 최대 표를 얻은 낙선자다. 무엇보다 트럼프는 ‘보수’ ‘진보’와 구별되는 자신의 고유한 이념적 브랜드를 가진 최초의 낙선자다. 이런 점에서 트럼프는 한마디로, 신도가 수천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종교의 교주급에 비유할 수 있다. 트럼프가 이번 선거를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는 건 그가 자기 주장이 거짓임을 몰라서가 아니다. 교주의 정통성을 믿고 싶어 거짓말이라도 듣기를 바라는 수많은 신도의 간절한 욕망에 부응하고 있을 뿐이다. 이 ‘트럼피즘’의 물결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계속 미국 정치에 대단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확실한 민주적 정치 프로세스가 이를 많이 도울 것이다.
2년 후 총선에서 트럼피즘 주목해야
160여 년 전 링컨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대원칙을 그 유명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고 설파했다. 미국은 그 원칙을 다음과 같은 구체적 제도로 실현하고 있다. 한마디로, 대통령과 집권당은 2년에 한 번씩 반드시 국민이 내 주는 시험을 쳐야 한다. 즉, 대통령에 취임하면 바로 2년 후, 중간고사, 즉 총선이 있다. 대통령이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국민은 여당 의원들을 많이 떨어뜨린다. 의석이 줄어드니 대통령이 남은 2년 동안 사실상 별일을 못 하게 되고 그러면 재선도 힘들어진다. 중간 선거 후 2년이 지나면 이번에는 본고사가 있다. 이번에는 국회는 물론, 대통령 본인까지도 심판을 받는다. 재선에 실패하는 건 대통령으로서는 엄청난 치욕이다. 이렇게 2년마다 받는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 강요하는 국민 우선주의, 이것이 바로 미국 정치의 핵심이다. 이렇게 국민을 진정한 나라의 주인으로 만들기 위해 미국은 건국 이래 무려 27번이나 헌법을 개정했다. 부러운 나라다.
이렇게 국민의 힘이 센 나라에서 자신의 고유한 이념으로 수천만 국민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휘젓고 다닌다고 생각해 보라. 당장 2년 후 총선에서 아마도 트럼프의 위력이 나타날 것이다. 단, 한 가지 변수가 있다. 트럼프에게 닥칠 탈세, 명예훼손 등 다양한 혐의 형사 소추 가능성이다. 이것은 상당히 살아있는 가능성이긴 하다. 결론적으로, 트럼프 게임은 미국 민주주의에 닥친 포퓰리즘의 거대한 폭풍이다. 그 직접적 영향권 아래 대한민국, 깊이 생각해서 지혜롭게 대처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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