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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가해자는 이웃이나 친구...대부분 동조하거나 방관했다

최만섭 2020. 11. 21. 13:40

학살 가해자는 이웃이나 친구...대부분 동조하거나 방관했다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0.11.21 08:57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32회>

“존재는 지각(知覺)이다(esse est percipi).” 영국경험론의 창시자 버클리(1685-1753) 주교의 명언이다. 아무리 큰 사건도 기록이 없다면 망각의 블랙홀로 빨려들고 만다. 600만 명이 학살된 홀로코스트의 참상도 연합군에 의한 영토점령, 현장검증, 물증확보, 사건조사, 증언 채록, 피해자 규명, 책임자 처벌, 법정 기록, 실시간의 언론보도, 실증적인 역사기록이 없었다면, 흔적도 없이 소멸됐을 수 있다. 우리는 오로지 기록을 통해서 과거의 역사를 인식한다. 역사는 지각이다.

 

다오현 학살 사건, 한 기자의 방대한 기록

1978년 12월과 1984년 5월 중공정부는 조사결과를 발표했지만, 문혁 피해의 진상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1984년 중공중앙의 발표에 따르면, 문혁시기 비자연적 사망자수는 172만8000명에 이른다. 그밖에도 최소 45만에서 최대 300만에 이르는 다양한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집단학살은 학살주체와 피해자에 따라 다음 세 시기로 나뉠 수 있다. 1) 1966년 8월-12월, 홍위병식 비판투쟁 및 베이징 다싱(大興)구 “홍팔월” 대학살극, 2) 1967년 1월-1968년 말, 군중조직의 탈권 투쟁, 무장투쟁 및 후난, 광시, 광둥 지역의 대량학살, 3) 1968년 가을-1970년 초, 군·경의 공권력에 의한 무력진압 및 대량학살이다. [1]

1984년 당시 중국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은 1967년 다오현의 학살사건을 조사하라 명령했다. 그 후 2년에 걸쳐 1300여 명의 관원들이 진상을 파헤쳤다. 당시 개혁적 관방언론 ‘개척(開拓)’지의 기자 탄허청(譚合成)도 다오현에 현장 취재를 나갔다. 그는 정부조사 결과를 실시간으로 접하면서 수많은 피해자 유가족들과 직접 인터뷰를 이어갔는데······. 1986년 말 갑자기 중국의 정치기류가 급변하면서 진상조사는 중단됐다. 비판적 언론인의 입엔 재갈이 물렸다. 탄허청의 르포는 출판될 수 없었다.

탄허청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진상을 규명하는 연구 작업을 이어갔다. 마침내 2010년 홍콩에서 605쪽의 방대한 그의 저작 ‘혈의 신화(血的神話): 1967년 후난 다오현 대도살 기실'이 출판됐다. 2017년 영역본이 옥스퍼드 대학 출판사에서 번역·출판되면서 다오현 대학살의 진상은 전 세계에 알려졌다. 탄허청의 저작은 현재 중국에선 유통·판매될 수가 없다. 대도살의 진상은 결국 중국공산당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직격탄이기 때문이다.

 

몽이로 이웃 때려죽이고 “아주 좋다!”

1967년 가을 추석 즈음 후난성의 한 작은 농촌마을의 트랙터 운전수 35세의 샤카이츄는 같은 마을의 무장집단에 끌려가 읍내 집회에서 가혹한 비투(批鬪)를 당했다. 1952년 이미 처형된 그의 부친이 지주라는 이유였다. 중공군 지원병으로 한국전쟁에 투입됐던 그는 “나라를 위해 전쟁터서 싸웠다”며 혜량을 구했지만, 그는 다섯 명 지주의 자식들과 함께 몰살당했다. 그를 직접 몽둥이로 때려죽인 자는 바로 옆집의 정멍쉬였다. 정은 몰수된 샤의 가택에 살고 있었음에도 샤를 때려죽인 후 일말의 죄의식도 없이 “아주 좋다!”를 외치며 마을로 돌아갔다 한다.

문혁기 중국 농촌 사회의 대학살을 탐구한 양쑤(Yang Su) 교수가 당시 그 마을에 살고 있던 노부부에게서 직접 채록한 증언이다. 이 사건은 1967년 늦여름에서 1968년 말까지 후난성, 광시성, 광둥성에서 대규모로 발생한 집단학살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첫째, 희생자들은 오로지 출신성분 때문에 학살당했다. 둘째, 농촌의 학살에선 농기구 등을 사용한 원시적 타살(打殺)의 방법이 사용됐다. 총알을 아끼기 위함이었다. 셋째, 대부분 학살은 이웃, 친구 등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났다. 넷째, 학살은 공개된 장소에서 발생했고, 주변엔 수많은 동조자 및 방관자가 있었다.

후난성 다오현의 대학살도 마찬가지였다. 1967년 8월 13일에서 10월 17일까지 66일에 걸쳐 다오현과 그 주변에선 9000여 명이 집단학살을 당했는데, 피해자의 90%는 대지주와 부농 등 이른바 흑오류(黑五類)와 그 가족들이었다. 그들은 토지와 가옥을 다 몰수당한 빈농들이었지만, 그들의 가슴엔 계급천민의 주홍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스탈린 시대 소련에서 그대로 이어진 사회주의 신분제의 유습이었다. 그들은 순전히 출신성분 때문에 같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잔인하고도 야만적인 살인의 방법으로 수많은 방관자의 목격 하에 공공연히 처형당했다.

 

학살 가담자 1만5000여명 대부분 20대 청년들

세계사 대학살을 유형별로 분류해 보면, 학살 주체에 따라 관판(官辦) 학살과 민판(民辦) 학살로 구분할 수 있다. 10개월에 걸쳐 4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1793년 프랑스 대학살은 당시 혁명정부의 명령에 따라 조직적으로 이뤄진 관판 학살의 대표적 유형이다. 반면 국가권력의 부재 때문에 발생하는 무법상황의 집단린치 등은 민판 학살이라 할 수 있다. 다오현 대학살의 주체가 중국공산당 정부라 할 수 있을까?

정부조사에 따르면, 학살 행위에 직접 관계한 인수는 1만5050명에 달했다. 그중 절반 이상이 다오현의 공산당 간부들이거나 당원들이었는데, 대부분 20대의 청년들이었다. 나머지 절반의 가해자는 정부와 직접 관련이 없는 군중집단이었다. 발발 과정을 보면 다오현 지방정부를 장악한 군사조직 인민무장부(武裝部)의 개입이 두드러진다. 인민무장부는 인민해방군 지방부대의 밑바닥 조직이었다. 명령체계상 군부의 관할이었지만, 관리체계상 지방정부의 지휘를 받았다. 기묘한 반군반민의 조직이었다. 당시 다오현에선 인민무장부의 주요 인물들이 현(縣) 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1967년 1월 상하이 탈권 이후, 중국 전역에서 군중집단에 의한 지방정권의 탈권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다양한 집단이 경쟁적으로 출현하자 마오쩌둥은 중공중앙, 중앙군사위, 국무원, 중앙문혁소조의 명의로 “혁명적 좌파군중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후 중앙정치의 상황은 전국을 혁명의 광열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1967년 1월 초부터 국가주석 류샤오치와 그의 부인 왕광메이를 향한 홍위병의 공격이 거세졌다. 1967년 7월 18일 중공중앙 본부 중난하이(中南海)에서 류샤오치를 공격하는 군중집회가 개최됐다. 그해 7월부터 1959년 파면당한 전직 국방장관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 역시 군중집회에 불려나가 계속 공격을 당했다. 급기야 1967년 8월 5일 톈안먼 광장의 백만인 대회에선 류샤오치, 덩샤오핑, 타우주(陶鑄, 1908-1969) 등이 비투당했다. 그날 인민일보는 한 해 전 작성됐던 마오의 대자보 “사령부를 폭파하라!”를 게재했다. 중앙권력의 교체를 공식화하는 수순이었다.

 

“혁명적 좌파 조직을 지원하고 계급 천민을 소탕하라”

중국현실에서 지방은 중앙의 풍악에 맞춰 춤을 춘다. 1967년 다오현엔 이미 두 개의 군중조직이 대립하고 있었다. 혁련(革聯)은 청년, 교사, 수공업자, 하층지식분자들이 주축을 이룬 조반파 조직으로 지방권력의 탈취를 노리고 있었다. 반면 홍련(紅聯)은 현지의 기득권 세력으로 지방정부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다오현 인민무장부는 홍련과 결탁하여 “혁명적 좌파군중 조직”을 지원한다는 명분 아래 “계급천민”을 소탕하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 후난성 다오현의 위치/ maps.google.com>

다오현 집단학살의 구체적 계획은 1967년 8월 2일-5일 인민무장부의 핵심 간부회의에서 가장 처음 논의됐다. 무장부 정위(政委) 류스빈(劉世斌)은 타이완의 장제스가 대륙침공을 획책하고 있으며 다오현의 반혁명세력의 탈권의 기회를 노린다는 민간의 소문을 근거로 계급 적인(敵人)에 대한 선제공격을 주장했다. 그는 혁명적 군중을 규합해 흑오류 반동세력에 대한 대규모의 비판투쟁을 개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를 본격적인 ‘군중독재’의 발동이라 표현했다. 지방정부가 직접 군을 풀어 대민살상을 하기 보단, 군중독재의 원칙에 따라 혁명적 좌파군중이 반동세력을 제압하는 시나리오를 계획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계속>

[1] Andrew G. Walder, “Rebellion and Repression in China, 1966–1971,” Social Science History , Vol. 38, No. 3-4 (Fall/Winter 2014), pp. 513-539.